[기초를 다지자] 89. 의학용어 쉽게 쓸 수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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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의료사고에 관한 법원 판결문을 볼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 쓴 모든 의학적 표현은 의사가 쓴 것을 판사가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표현이 다음과 같이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기관내 삽관제거(extubation)를 함으로써 인공호흡으로부터 완전이탈(weaning)을 실시하였다"

"급성 편도선염의 일반적인 증상은 발열 및 인후통과 연하장애이고 편도선 부위의 충혈 및 발적이 나타나며…" 라는 식이었다.

언뜻 보아도 불필요한 영어와 한자가 끼어든데다 표현이 부자연스럽다. 이를 다음과 같이 고쳐보면 어떨까.

"기관 내 관을 제거해 인공호흡을 중지했다. "

"급성 편도선염의 일반적인 증상은 열이 나고 목구멍이 아프며 삼키기 곤란하고 목구멍 부위가 벌겋게 보이며…. "

정부는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과학이 뿌리를 내리려면 우리말 학술용어의 통일이 필요하다고 보고 각 학술단체에 그 제정을 의뢰했다.

당시 대한의학협회는 독자적으로 77년 의학용어집 초판을 출간했다. 거기엔 2만개의 용어가 포함돼 있었다. 그 뒤 필자 등 각계 전문가가 참여한 의협 의학용어실무위원회를 중심으로 영어나 일본어.한자어 대신 쉬운 우리말 위주로 92년 3판, 올해 초 4판을 냈다.

우리 한글은 백성들을 편하게 해주려고 창제해 고귀한 품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의료계 내부에선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새로 통일한 의학용어를 사용하는데 인색하다.

'영어나 한자어라야 학술용어답다' 는 일부 의료인의 태도는 중국 것을 찬양만 했던 조선시대의 일부 지식인을 연상케 한다. 이제 전문가들이 조선시대처럼 백성 위에 군림할 수 없으며 더불어 사는 시대가 됐다.

의료인들은 우리말 의학용어를 더욱 가다듬고 가꿔야 한다. 우리말 의학용어는 이 시대 우리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정인혁 <연세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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