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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실을 붓삼아, 삶과 죽음 엮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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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여러 개의 의자를 붉은 실로 엮고 연결해 만든 설치작품 ‘우리들 사이’. 존재와 부재, 사람 간의 관계라는 주제를 담았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시작이다. [사진 가나아트]

여러 개의 의자를 붉은 실로 엮고 연결해 만든 설치작품 ‘우리들 사이’. 존재와 부재, 사람 간의 관계라는 주제를 담았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시작이다. [사진 가나아트]

일본 출신의 설치미술가 시오타 치하루(48) 개인전 ‘우리들 사이(Between Us)’가 인기다. 이달 18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와 한남동 가나아트 나인원 두 곳에서 전시를 연 이후 하루 200~300명 관객이 다녀가고, 컬렉터들의 구매 경쟁도 치열하다. 인천파라다이스시티 그룹전에서도 전시 중이다.

일본 설치미술가 시오타 치하루 #국내 전시 평일에도 수백명 몰려 #사전 목록 나오자 구매경쟁 치열

이정용 가나아트 갤러리 대표는 “전시를 앞두고 주요 고객들에게 작품 목록이 공개되자마자 순식간에 주문이 쇄도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치하루의 국내 개인전은 처음이지만 앞서 열린 몇몇 전시를 통해 작가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는 관람객이 적지 않다”며 “드로잉과 조각, 작은 설치 작품은 작가의 지명도에 비해 가격도 그리 높지 않아 컬렉터들이 더 몰렸다”고 말했다.

여러 개의 의자를 붉은 실로 엮고 연결해 만든 설치작품 ‘우리들 사이’. 존재와 부재, 사람 간의 관계라는 주제를 담았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시작이다. [사진 가나아트]

여러 개의 의자를 붉은 실로 엮고 연결해 만든 설치작품 ‘우리들 사이’. 존재와 부재, 사람 간의 관계라는 주제를 담았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시작이다. [사진 가나아트]

치하루는 ‘실의 작가’로 불린다. 드로잉과 조각도 하지만 가느다란 털실로 엮는 설치 작업이 대표적이다. 특히 넓은 전시장을 통째로 활용해 ‘공간’을 엮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키는 실로 만들어낸 그의 작품은 섬세하면서도 웅장하고, 섬뜩하면서도 우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치하루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대표작가로 주목받았고, 지난해 독일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과 일본 도쿄 모리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특히 모리 미술관 전시엔 66만 명이 찾았다. 국내에선 올해 4월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영혼의 떨림’전(모리미술관 공동기획)을 열었으나, 코로나19로 성황은 이루지 못했다.

서울 한남동 가나아트 나인원의 드로잉과 설치작품. [사진 가나아트]

서울 한남동 가나아트 나인원의 드로잉과 설치작품. [사진 가나아트]

창틀, 의자, 침대, 여행 가방, 열쇠 등 일상 속 사물을 활용한 치하루의 작품엔 삶의 유한함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녹아있다는 평을 받는다. 어릴 때 목격한 이웃집 화재에 대한 기억, 두 번의 암 투병으로 마주한 죽음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작품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작 중 여러 개의 열쇠를 작은 메탈 박스 안에 실로 엮은 작품 ‘존재의 상태(State of Being)’도 그중 하나다. 작가가 베를린 유학 당시 이용했던 현관 열쇠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 작품은 부유하는 듯한 현대인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시오타 치하루

시오타 치하루

가장 눈에 띄는 건 대형 설치작업 ‘우리들 사이’(2020).  가나아트센터 2층 전시장 전체 300㎡의 공간에 30개의 낡은 의자를 놓고 붉은 실로 엮은 이 작품은 독일에서 온 전문 스태프 등 총 10명의 작업자가 12일동안 완성했다.

오사카 출신으로 교토 세이카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1996년 독일 유학을 떠나 함부르크 조형대학 등에서 공부했다. 유학 시절 그는 이상한 꿈을 꿨다고 한다. “내가 평면 그림의 일부가 된 꿈에서 물감으로 뒤덮여 숨을 쉴 수가 없었다”는 그는 이후 그림 대신 실을 가지고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치하루는 아트·디자인 전문매체 디자인붐과의 인터뷰에서 “실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나는 비로소 무한의 우주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최근 그의 작업엔 혈관, 세포, 피부 등을 연상시키는 작품이 늘고 있다. 붉은 실은 생명체 안 혈관을 상징한다. 김선희 전 부산시립미술관장은 “치하루는 암투병을 해오면서도 작업을 지속해왔다”면서 “그의 작업 하나하나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우리의 생명과 존재에 대한 서사시”라고 말했다. 가나 나인원 전시는 8월 2일까지, 평창동 전시는 8월 23일까지, 인천파라다이스시티 아트스페이스 전시는 10월 4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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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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