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의료정책] 4. 의보지출 왜 폭증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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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이 재정위기에 몰리면 국민의 부담을 늘리는 것이 통상적인 당국의 해법이었다. '재정 적자=보험료 인상' 이라는 손쉬운 등식을 되풀이해온 것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오는 7월부터 보험료를 20% 올려 급한 불을 끈다는 방안이 보건복지부(http://www.mohw.go.kr)에 의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재정 위기는 국민의 의료비 씀씀이가 너무 크거나(수요자측 요인) 병.의원이나 약국 등이 과다한 수입을 가져갈 때(공급자측 요인) 발생한다. 이중 수요자측 요인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보험적용 대상자가 늘고 노인인구가 증가하고 소득이 늘어 자주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것을 문제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의보 수가(酬價) 인상, 고가 의료장비 과다 도입, 과잉진료, 고가약 사용 증가, 허위청구 등 공급자측 요인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느냐가 보험재정 안정의 관건이 된다.

즉 수입을 늘리기보다 지출을 줄이는 쪽에 역점을 둬야 재정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문제는 정부가 의료공급자들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려 지출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참여연대.전국사회보험노조 등도 지출억제 정책의 실패가 이번 재정위기를 불렀다고 진단한다. 정부의 퍼주기식 보험수가 인상과 의료계의 부당.허위 청구에 따른 재정 누수가 본질적인 원인이라는 것.

전문가들은 의보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의약분업을 시작하면서 지급액 지출 억제를 위한 정책을 동시에 시행하지 않고 오히려 지출을 늘리는 수가 인상 등을 거듭한 것이 재정 대란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지적한다.

◇ 과도한 수가 인상=1999년 11월부터 다섯차례에 걸쳐 의보 수가가 48.9%나 올랐다. 이는 의약분업 전후 의료계 반발을 다독거리기 위한 선심성이라는 느낌이 짙다.

수가 인상은 국민건강보험공단(http://www.nhic.or.kr)이 병.의원과 약국 등에 지불해야 할 지급액을 높였다. 분업효과가 나타나기 전인 지난해 1~10월에 비해 지난해 11월~올 2월에는 지급액이 월 56%나 늘어났다.

올 1월 의보 수가 인상분이 반영되는 3월 이후에는 지급액이 지난해보다 66%나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의사의 진료행위별로 난이도 등을 감안해 점수를 매겨 의보 수가를 계산해내는 상대가치 점수체계도 수가를 올리는 데 기여했다.

건강보험심의조정위원회가 지난해 12월 의료행위의 상대가치 점수를 확정하면서 점수를 올리기만 하고 난이도가 낮은 진료행위에 대해서는 점수를 낮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 과잉진료 낳는 행위별 수가제=진료행위 하나 하나마다 진료비를 지급하는 행위별 수가제를 수십년 동안 손보지 않은 것은 실패한 지출억제 정책의 전형이다. 우리나라처럼 병.의원의 80%를 민간이 운영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행위별 수가제를 보완하는 정책이 필연적으로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양봉민 교수는 "행위별 수가제는 진료행위가 늘어나면 청구액이 불어나므로 과잉진료를 불러오게 돼 있다" 며 "이 제도가 의료비 및 건강공단의 지급액 증가를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 이라고 분석했다.

◇ 대형병원만 살찌는 종별 가산제=의료기관 종별 가산제는 환자의 대형병원 집중을 막기 위해 만든 제도다. 진료행위료를 병원 규모에 따라 의원은 15%, 병원은 20%, 종합병원은 25%, 종합전문요양기관(대학병원 등 대형 종합병원) 은 30%씩 가산토록 한 것. 그러나 환자가 대형병원에 몰리는 현상은 여전한 채 환자부담과 의보 재정만 축내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종합병원의 건당 진료비는 4만2천원으로 의원의 1만2천원보다 3.5배나 많았다.

복지부 송재성 연금보험국장은 "종합병원 외래를 찾는 환자의 75%는 7일 이내 치료가 끝나는 비교적 경미한 환자" 라며 "전체 외래환자의 13%가 종합병원을 찾는데 이들 종합병원이 전체 외래 진료비의 29%를 가져가는 것이 문제" 라고 말했다.

◇ 만연하는 부당.허위청구=병.의원과 약국 등의 부당.허위청구는 그 피해가 바로 국민에게 돌아온다. 유령환자 만들기, 진료일수.방문횟수 늘리기 등 다양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심사를 통한 청구액 대비 삭감률은 지난해 1.07%에 그쳤다. 이는 지난해 산재보험 삭감률(2.16%) 의 절반 수준.

미국 보건부 감사국에 따르면 97년 메디케어(고령 저소득층 의료보험) 청구의 14%가 부정청구였다.

일부 병.의원들이 전문회사나 개인을 통해 불법적으로 청구 대행을 시키고 있는 것도 재정 누수를 확대시키고 있다. 대행기관은 의료기관으로부터 진료기록부를 넘겨받아 보험급여 청구업무를 대신해주고 청구 금액의 일정액(3~5%) 을 수수료 명목으로 챙긴다.

◇ 세계 최고 수준의 고가 의료장비 보유=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전국 의료기관 7백96곳을 대상으로 한 전화조사에서 컴퓨터단층촬영장치(CT.의보 적용) 보급률은 74%(5백88곳) 나 됐다.

더 고가인 자기영상공명장치(MRI.올 연말께 의보 적용 예정) 도 의료기관 중 28%(2백19곳) 나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고가 의료장비의 무분별한 도입은 바로 진료비 증가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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