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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정치인 타계에 12세 흑인소년이 눈물 흘린 까닭

중앙일보

입력

지난 2018년 3월 앨라배마주 셀마의 한 교회에서 존 루이스 민주당 하원의원이 자신을 찾아온 당시 10살 소년 타이브리 파우와 포옹하고 있다. [CNN 캡처]

지난 2018년 3월 앨라배마주 셀마의 한 교회에서 존 루이스 민주당 하원의원이 자신을 찾아온 당시 10살 소년 타이브리 파우와 포옹하고 있다. [CNN 캡처]

올해 12살 미국 소년에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한 하원의원은 영웅이자 친구, 그리고 정치적 동지였다.

미 언론 "어떻게 존 루이스는 자신의 삶을 영원히 남겼나"

미국 남부 테네시주(州) 존슨시티의 한 흑인 소년 타이브리 파우(Tybre Faw)와 흑인 인권운동의 대부 존 루이스 민주당 하원의원(애틀랜타)의 얘기다. 지난해 췌장암 4기라고 밝힌 루이스는 지난 17일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진 셀마

타이브리와 루이스의 우정은 지난 2018년 3월 앨라배마주 셀마의 한 교회에서 시작됐다. 셀마는 루이스를 세상에 알린 196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당시 루이스는 600여명의 흑인과 함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를 건너는 평화행진을 벌이다 경찰에게 폭력 진압을 당했다. 루이스가 땅에 쓰러진 채 경찰에게 맞아 두개골이 골절되는 장면은 TV에 생생히 보도됐다. 이는 흑인 인권 문제가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라 그해 8월 린든 존슨 대통령이 흑인 참정권을 인정하는 연방 투표권법에 서명하는 계기가 됐다.

지역 언론 존슨시티프레스에 따르면 2년 전 초등학교 4학년생이던 타이브리는 역사 공부를 하던 중 마틴 루서 킹 목사의 1960년대 흑인 인권 운동에 감명을 받았다. 더불어 마틴 루서 킹과 함께 운동을 이끈 '6명의 거물'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서 의회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는 자신의 영웅이기도 한 루이스 의원이었다.

2018년 3월 앨라배마주 셀마의 한 교회에서 민주당 하원의원인 존 루이스와 당시 10세였던 소년 타이브리 파우가 만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CNN 홈페이지 캡처]

2018년 3월 앨라배마주 셀마의 한 교회에서 민주당 하원의원인 존 루이스와 당시 10세였던 소년 타이브리 파우가 만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CNN 홈페이지 캡처]

'역사 덕후'와 '살아있는 역사'의 만남 

타이브리는 루이스를 만나기 위해 할머니와 어머니를 설득했다. 타이브리의 가족은 소년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7시간에 걸쳐 운전해 테네시주에서 앨라배마주로 넘어갔다.

루이스는 자신이 이끄는 셀마 '연례 인권 순례' 행사장에 한 소년이 팻말을 들고 서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소년의 팻말에는 "루이스 감사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용기, 순수한 용기를 내는 법을 보여줬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역사 덕후' 소년과 '살아있는 역사'인 고령 정치인의 첫 만남이었다. 영웅의 얼굴을 본 소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한 인간의 생애 주기를 건너뛴 인권 운동 동지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CNN에 따르면 어린 인권 운동가가 된 타이브리는 루이스와 개인적 친분을 유지하며 학교에서 흑인 인권을 위한 목소리를 냈다. 애틀랜타에서 열리는' 삶을 위한 행진'에 동참하기도 했다.

주어진 시간은 딱 2년뿐  

지난 3월 앨라베마주 셀마에서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던 존 루이스 민주당 하원의원이 자신을 만나러 온 타이브리 파우와 팔꿈치 인사를 나누고 있다. [CNN 캡처]

지난 3월 앨라베마주 셀마에서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던 존 루이스 민주당 하원의원이 자신을 만나러 온 타이브리 파우와 팔꿈치 인사를 나누고 있다. [CNN 캡처]

하지만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루이스의 몸에 암세포가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9년 12월 루이스는 췌장암 4기 선고를 받고 이 사실을 세상에 밝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거세게 확산되던 올해 3월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만났다. 타이브리는 루이스가 매년 참석해 온 셀마 행진 장소로 갔다. 타이브리는 투병 중인 루이스를 만나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타이브리가 온 것을 알고 차에서 나와 그를 만나러 갔다. 두 사람은 팔꿈치 인사를 나눴다. 그게 마지막 인사였다.

소년의 생애로 이어진 루이스의 삶   

CNN에 따르면 소년은 루이스의 사망 소식에 "나도 세상도 루이스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며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애도했다.

이어 "루이스를 만나기 전 나는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을 거라 기대하지 못했다"며 "그를 만난 건 축복 같은 일이었다"고 떠올렸다.

미 언론은 '존 루이스는 한 소년과의 우정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영원히 남겼나'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들의 관계를 조명했다.

실제 타이브리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언제까지나 나의 영웅이다. 나도 그와 같이 좋은 시련(good trouble)에 처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타이브리는 루이스의 사망과 함께 자신도 의회 의원이 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소년의 존재를 알게 된 미국 그룹 '보이즈 투 맨'의 나단 모리스는 기부 사이트 '고 펀드 미'를 통해 "우리는 이 빛이 타 없어지게 둘 수 없다"며 타이브리를 위한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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