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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커닝' 대학가 보고있나···65년 무감독시험 '제물포의 양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해 4월 무감독 시험 선서식에서 제물포고 학생들이 양심 선서를 하고 있다. [제물포고 제공]

지난해 4월 무감독 시험 선서식에서 제물포고 학생들이 양심 선서를 하고 있다. [제물포고 제공]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

지난달 19일 오전 11시쯤. 인천시 중구 제물포고 한 교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간고사를 앞둔 학생들이 양심선서를 하는 소리였다. 이날 제물포고 1학년 학생 144명은 입학 이후 처음으로 무감독 시험을 치렀다.

양심 선서가 끝나자 교사들은 서로 거리를 둔 채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시험지를 나눠줬다. 교사가 이상 유무를 파악한 뒤 교실 밖으로 나가자 시험 감독관이 없는 채로 시험이 시작됐다. 교사는 긴급상황에 대비해 복도에서 대기할 뿐 시험에 개입하지 않았다. 시험 종료 10분 전 교실로 돌아온 교사는 답안지를 교환해주고 종소리가 울리자 답안지를 걷었다. 연이은 시험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

위기 딛고 60년 넘게 이어진 전통

 지난해 4월 제물포고 학생들이 무감독 시험을 앞두고 양심선서를 하고있다. [제물포고 제공]

지난해 4월 제물포고 학생들이 무감독 시험을 앞두고 양심선서를 하고있다. [제물포고 제공]

무감독 시험은 제물포고의 오랜 전통이다. 자율과 양심을 강조했던 길영희 초대 교장의 뜻에 따라 1956년 1학기 중간고사부터 시작된 시험방식이 올해로 65년째를 맞았다. 제물포의 무감독 시험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건 최근 온라인 시험을 치르는 수도권 대학에서 잇따라 집단 커닝 등 부정행위가 적발되면서다. 지난 4월 인하대 의과대 1학년 41명이 온라인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러 징계를 받았다. 한국외대와 중앙대 온라인 시험에서 카카오톡 채팅방으로 시험 답안을 공유하는 일도 있었다.

제물포고에도 위기는 있었다. 이 학교에 근무했던 한 교사에 따르면 1990년대 말 한 학생이 친구에게 답을 알려주는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무감독시험을 폐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논란이 커지자 학생들은 무감독 시험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모아서 학교에 제출했다. 한 학생은 “저는 매번 시험을 치르면서 승리해왔는데 무감독시험이 없어진다면 승리하는 삶이 없어지는 것”이라며 강하게 무감독 시험 존치를 주장했다. 부정행위에 가담한 학생도 전학을 가면서 “제 과오로 학교전통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폐지는 없던 일이 됐다. 고교 평준화·학생부 강화 등 교육정책이 수없이 바뀌는 동안에도 무감독 시험은 60년 넘게 이어졌다.

학교 걱정 날린 1학년 소감문

제물포고는 학년 별로 구성된 양심지원단을 통해 학생들이 무감독 시험의 전통을 이해할 수 있게 돕고 있다. [제물포고 제공]

제물포고는 학년 별로 구성된 양심지원단을 통해 학생들이 무감독 시험의 전통을 이해할 수 있게 돕고 있다. [제물포고 제공]

제물포고 교사들은 올해 중간고사를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등교가 미뤄진 데다가 교육부가 학교별 등교 인원을 3분의 1 이하로 제한하면서 학사 운영에 차질이 생겨서다. 1학년 학생들은 학교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중간고사를 맞았다. 제물포고는 매년 4월 무감독 시험 선서식을 열었다. 입학한 1학년에게 무감독 시험의 취지와 역사 등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졸업생까지 참여하는 큰 행사였지만 올해는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취소됐다.

제물포고는 재학생이 졸업할 때 양심인증서를 수여한다. 심석용 기자

제물포고는 재학생이 졸업할 때 양심인증서를 수여한다. 심석용 기자

걱정은 기우였다. 중간고사가 끝난 뒤 1학년 학생들은 시험 소감을 적은 체험기를 제출했다. 학생 대부분이 무감독 시험에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1학년 임모(16)군은 “처음엔 무감독 시험으로 경계가 강할 텐데 뭣 모르고 한 행동이 부정행위로 간주하지 않을까 걱정했다”면서도  “막상 시험이 끝나고 나니 우리 학교는 공동체에 꼭 필요한 양심을 길러내는 해결책을 오래전부터 갖춰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윤모(16)군도 “시험 전에는 신기하면서도 고민이 있었지만 지나고 나니 서로 간의 신뢰를 쌓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며 “괜히 전통이 60년 넘게 이어진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수남 제물포고 교장은 “학교 내신이 중요해지면서 타 학교에서는 시험 감독 교사를 늘려달라고 하기도 한다”면서도 “제물포고는 학교 구성원이 원한다면 최대한 무감독 시험 전통을 계속 이어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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