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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弄月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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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자(亭子)는 선비들의 자연관.인생관이다. 정자는 우리식 정원이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사람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갇힌 정원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열린 공간에 던져진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상징이다.

중국식 정원은 인공 연못을 파고 기암괴석을 앉히고 담장으로 겹겹이 구획을 지어놓는다. 일본인들은 모래 한 알과 풀 한 포기까지 다듬고 비틀어 미니어처 선경(仙境)을 연출해낸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한반도의 산과 계곡이 이런 인공미를 무색케 함을 일찍이 알아챘다. 자연을 가공하기보다 그 날것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정자는 터를 잘 잡아야 한다. 선비들이 생각하는 자연미와 이상향에 가까운 곳을 골라야 한다. 정자는 자의든 타의든 고향산천으로 돌아온 선비가 여유를 즐기는 공간이다.

심심파적이든 재충전이든 정자 문화의 최대 모토는 음풍농월(吟風弄月)이었다. "한 잔 먹사이다/또 한 잔 먹사이다/꽃 꺾어 산(算) 놓고/무진무진(無盡無盡) 먹사이다…"(정철의 시조 '장진주사(將進酒辭)'중에서)던 풍류다. 술과 꽃만 아니라 거문고와 필묵과 바둑도 빠지지 않았다. 때로는 당쟁과 논쟁의 산실이기도 했다.

정자터엔 깨끗한 계곡의 물소리가 끊이지 않고, 솔향기 품은 소슬한 바람이 그윽해야 한다. 맑은 물로는 마음을 씻고, 소슬한 바람은 땀을 씻었다. 햇살은 물고기 비늘에 번득이고, 달빛은 맑은 물결에 일렁이며 정자에 기댄 선비와 농(弄)을 주고받는다. 사방의 자연을 모두 안으려다 보니 정자는 활짝 트였다. 주련(柱聯.벽에 써 붙이는 글씨) 붙인 기둥과 팔작지붕은 날렵해 정자 스스로 산수(山水)의 일부인 듯 자연스러워야 좋다.

그런 명당 중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 경남 함양의 안의계곡이다. 덕유산 계곡물이 너럭바위를 끼고돌며 곳곳에 못을 만들었고, 놓칠세라 세워진 정자가 많아 팔담팔정(八潭八亭)으로 불리던 명승이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농월정(弄月亭)이다. 달을 담아내는 작은 웅덩이를 품고 있는 월연암(月淵岩)을 내려다보며 소나무숲을 등지고 있다. 조선 선조 때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가 유유자적한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그 농월정이 지난 5일 방화로 전부 타버렸다. 그 무슨 억하심정일까. 추론하기조차 힘든 반달리즘(vandalism)이다.

오병상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