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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라는 전시상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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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갖고 싶어 하지 않을게요. 이길 때까지는”

1942년 태평양 전쟁 2년차에 일본 곳곳에 나붙었던 표어다. 전국민 표어모집에 11세 소녀가 쓴 (나중에 아버지 쓴 것으로 확인됨) 것이 당선됐다. 전쟁에서 이길 때까지는 갖고 싶다고 조르지도, 불평을 말하지도 않겠다는 비장함이 소녀의 시점이어서 더 무겁게 느껴진다. 강요하지 않았지만, 신민으로서 국가의 전쟁에 협력하겠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데 유용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확산된 뒤 ‘불요불급(不要不急)의 외출은 자제 해달라’는 말을 수시로 듣는다. 결코 강제가 아니지만 코로나19가 종식될 때까지 불필요한 외출은 자제하고 욕구는 참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흡사 78년전 전시 상황을 떠올린다. 락다운(Lockdown·도시봉쇄) 같은 강제력을 발동하지 않더라도, 법률 만큼의 효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정권의 눈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긴급사태 선언이 감염증 관련 법령에 처음으로 명시됐다. 평시라면 야당이 적극 반대했겠지만,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 공포 앞에서 반대 명분을 찾지 못했다. 법안은 절대 다수 찬성으로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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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도 이 기회 놓치지 않았다. 지난 3일 헌법의 날을 맞아 “긴급사태 대응을 헌법에 어떻게 자리매김 할 것인지 대단히 무겁고, 중요한 과제”라면서 개헌 논의를 촉구했다. “불 난 집에서 도둑질 하는 거냐”라는 비판은 나왔지만, 개헌이 숙원 과제인 아베 총리에게 한결 수월해진 판국이다.

정치인들은 “일본은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락다운 조치를 할 수 없다”면서 강력한 행정권력을 아쉬워 했다. 락다운 없이 코로나19를 조기에 수습했던 한국의 사례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는다. 언론이 한국 사례를 언급할 땐 확진자의 정보 공개에 초점이 맞춰진다. 정부가 개인의 신용카드, 휴대전화 정보를 확인해, 감염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을 부각한다. “공익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일반 시민들의 인터뷰도 곁들여진다.

지식인들은 이 때를 틈 타 행정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우려한다.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는 “감염증 공포 때문에 자유와 프라이버시 논의가 급속히 후퇴하는 ‘감각의 마비’가 두렵다”(중앙공론 6월호)고 했다.

혼란의 시기엔 악의는 약자를 향한다. 휴업 요청을 거부한 파친코점 앞에서 행패를 부리며 ‘자경단’ 행세를 하는 시민, 확진자가 나왔던 학교 학생들이 ‘코로나, 코로나’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연. 있어선 안되는 일들이 코로나19라는 전시상황에서 벌어진다. 가끔 등골이 오싹해진다.

윤설영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