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부산여행 안내가 마지막" 중국어 가이드의 막막한 일상

중앙일보

입력 2020.04.04 08:00

업데이트 2020.04.04 09:41

관광업계는 붕괴 직전이다. 예년 같으면 한창 바쁠 계절인데, 업계 종사자 모두 손을 놓고 있다. 모두가 힘들다지만 관광업계에서 가장 곤란한 이들이 관광통역안내사, 즉 관광 가이드다. 관광산업의 최전선을 지킨다는 자부심은 허울 뿐이다. 프리랜서 신분이어어서 정부 지원금도 해당사항이 없다. 15년 차 중국어 안내사 P(39)씨의 막막한 일상을 들었다.

관광통역안내사 P씨가 오랜만에 덕수궁을 찾았다. 평소 같았으면 벚꽃이 만개한 지금이 한창 바쁠 때인데 덕수궁에 꽃이 핀지도 몰랐다고 했다. 최승표 기자

관광통역안내사 P씨가 오랜만에 덕수궁을 찾았다. 평소 같았으면 벚꽃이 만개한 지금이 한창 바쁠 때인데 덕수궁에 꽃이 핀지도 몰랐다고 했다. 최승표 기자

일이 끊겼을 것 같다.
2월 초, 말레이시아 단체 관광객의 부산 여행을 안내한 게 마지막이었다. 안내를 마치고 2주간 자가격리를 한 뒤로 쭉 집에서 지내고 있다.
단체가 없으면 수익이 전혀 없나? 
그렇다. 특정 여행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경우도 있지만, 월급을 받는 직원 개념이 아니다. 행사마다 일당을 받는다. 다른 업종의 프리랜서처럼 매년 5월 종합소득세 3.3%를 내고 있다. 회사에서 4대 보험을 내주는 안내사는 거의 없다. 일당을 모아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을 납부한다. 일이 끊기니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도 부담으로 다가온다.

안내사는 일당을 받는다. 경력·언어에 따라 하루 10만~30만원 받는다. 일당 없이 쇼핑 수수료에 의존하는 안내사도 많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18년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 소지자는 3만1790명이다. 중국어 자격증 보유자가 1만2186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일본어(1만877명), 영어(7664명) 순이다.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는 실제 활동 중인 안내사를 5000명 이하로 추정한다.

[코로나 생존기]
중국어 관광가이드 P씨의 코로나19 일상
프리랜서 신분이어서 정부 지원에서 배제
“2월 초 이후 수입 없어, 건강보험도 부담”

3월 30일 정부가 프리랜서 지원책을 발표했는데.
뉴스를 봤다. 우리도 해당하는지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4대 보험 같은 안전망이라도 마련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었다. 여행사 직원은 휴직수당을 받거나 실업급여라도 챙길 수 있다. 소속이 없는 우리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함께 관광업에 종사하고 똑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여행사 직원만 챙기는 것 같다. 심리적 박탈감이 크다.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는 2월 26일 담화문을 발표한 바 있다. 안내사가 정부의 관광업계 지원 사각지대에 있으니 긴급 생계 지원금과 마스크·손 소독제 등 생필품을 지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3월 22일에는 관광통역안내사를 ‘특수고용직’으로 인정해달라고 청와대 청원을 올렸다.

문체부·관광공사 같은 관광 당국에서도 지원이 없나.
없다. 관광통역안내사는 국가 공인 자격증을 취득한 전문 인력이다. 늘 우리가 한국의 얼굴이라 생각하며 현장을 지킨다. 관광지에서 해설만 하는 게 아니다. 손님이 아프면 응급실에 데려가고 소매치기를 당하면 경찰서에 함께 간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을 24시간 돌본다는 심정으로 일한다. 정작 우리는 국가의 돌봄을 못 받는 것 같다. 감염병이나 외교 분쟁으로 위기를 겪을 때면 더 소외되는 것 같다.
당장 생계가 막막할 것 같다. 다른 일을 알아보진 않았나.
아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어 버티고는 있다. 동료 가운데 다른 일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지만, 코로나19로 산업 전반이 위축돼 있어 마땅히 할 일도 없단다. 자부심을 갖고 15년간 해온 일이다. 하루아침에 다른 일을 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관광통역안내사 P씨는 외국 관광 단체가 오면 경복궁 아니면 덕수궁을 꼭 들른다고 했다. 최승표 기자

관광통역안내사 P씨는 외국 관광 단체가 오면 경복궁 아니면 덕수궁을 꼭 들른다고 했다. 최승표 기자

코로나19 확산 이전은 어땠나.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2015년 메르스, 2016년 중국 한한령(限韓令)의 여파가 계속 이어졌다. 중국 시장이 어느 정도 회복됐다지만, 덤핑 경쟁이 심해져 수익이 많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대만이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같은 동남아시아의 중국계 관광객을 주로 안내하고 있다.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가이드 일이 돈을 많이 벌긴 어렵다. 그냥 일 자체가 좋아서 하는 거다. 한국을 잘 모르던 손님이 한국에 좋은 인상을 갖게 됐다고 할 때, 자국으로 돌아간 뒤 감사 인사를 전해올 때 뿌듯하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할 수도 있다. 대비책은?
뾰족한 수가 없다. 그저 해이해지지 않으려 한다. 책 읽고 넷플릭스 보면서 언어와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 위기 때 잘 버틴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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