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부총리 거취 오늘 고비 - 노무현 대통령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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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중복 제출 등 도덕성 논란으로 사퇴 요구를 받고 있는 김병준 교육부총리가 31일 오후 외부 일정을 마치고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에 들어서고 있다. 김태성 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31일부터 '공식 휴가'에 들어갔다. 하지만 관저에서 한명숙 국무총리와 오찬을 겸한 단독회동을 하고 김병준 부총리 거취 문제를 논의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은 이병완 비서실장과 관련 수석들도 불러 대책회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긴박감이 느껴졌다. 회의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한 측근은 "대통령은 상황을 수시로 점검하고 있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이 '김병준 딜레마'에 빠졌다는 방증이다. 김병준 교육부총리를 해임해야 한다는 의견이 야당은 물론 열린우리당 안에서도 갈수록 힘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민주당.민주노동당은 사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김 부총리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자 임명권자인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압박이 전방위로 진행되는 모양새다.

이제 공은 노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노 대통령의 카드는 두 가지다. 그대로 놔두든지, 아니면 그만두게 하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결정하든, 집권 후반기 국정 운영 구상이 흐트러질 공산이 크다는 데 노 대통령의 고민이 있다. 경우에 따라선 국정이 표류하고 요동칠 가능성이 크다. 최악의 경우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으로부터 탈당 요구에 직면할 수도 있다. 임기를 19개월이나 남겨두고 있는 시점이다. 때문에 "국정 운영의 최종 책임이 있는 노 대통령 입장에선 조기 레임덕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31일 오후 국회 교육위 소집이 결정되고 한명숙 총리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겠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여권에선 "노 대통령이 한 총리를 앞세워 김 부총리 해임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 "교육부 수장, 높은 도덕성 요구돼"=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31일 당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국민이 교육부 수장에 대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라며 "지난날엔 관행으로 이뤄진 측면이 있지만 지금은 새로운 시대이고 새로운 관행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김 부총리 사퇴 요구를 공식화한 것이다. 코드 인사 문제로 사사건건 부닥쳐온 당.청 관계의 변화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 유임이냐, 해임이냐=김 부총리를 해임하든 유임하든 고민이 따른다. 우선 여론을 거스르고 유임 결정을 할 경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게 뻔하다. 열린우리당과의 관계에 파열음이 생기면 정국은 요동치게 된다. 가뜩이나 여론을 무시한 노 대통령 특유의 코드 인사, 회전문 인사 방식에 대한 당내 반발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김 부총리의 경우 내정 때부터 잡음과 반발이 있었지만 노 대통령은 이를 무시하고 임명을 강행했다. 문재인 전 민정수석의 법무부 장관 내정설, KBS 정연주 사장의 연임설까지 겹쳐 여당 내 분위기도 뒤숭숭하다. 이렇게 될 경우 당쪽에서 먼저 노 대통령의 탈당 요구를 공식화할 수도 있다. 대통령의 '정치적 고립'이 초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게 해임설이다. 한명숙 총리의 '해임 건의'라는 카드를 통해 '사퇴 불가론'을 강조해 온 청와대의 부담을 덜면서 사퇴 요구를 해 온 여당에도 명분을 실어줄 수 있다. 노 대통령이 김 부총리를 사퇴시킨다면 우선 당의 반발을 무마하고 당.청 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 당의 협조를 얻어 집권 후반기 개혁과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대신 부담이 있다. '김병준 카드'의 포기는 참여정부 국정 로드맵의 완성과 개혁과제의 안정적 수행이라는 노 대통령의 후반기 국정 운영 구상에 차질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로드맵의 입안 단계부터 호흡을 맞춰온 참모 중 참모인 김 부총리의 해임은 노 대통령에게는 치명적 타격이자 손실이다.

◆ 청와대의 미묘한 기류 변화=표절 시비가 처음 불거졌을 때 청와대는 "사퇴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했다. 주말이 지나면서 무게 중심이 진실 규명 쪽에 맞춰지고 있다. 정태호 대변인은 "이번 사안이 사퇴할 정도는 아니라는 청와대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는 게 공식적인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김 부총리가 진실 규명을 제안했으니 거기서부터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1일 국회에서 교육위를 열어 이 문제를 따지기로 한 데 기대를 걸고 있다. '청와대의 대응이 달라진 것이냐'는 질문에 일부 참모들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핵심 참모는 "사퇴 여부를 논하기엔 이른 시점"이라며 "국무위원을 단순한 의혹만 갖고 해임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사실관계를 충분히 따져본 뒤 거취 문제를 결정하겠다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한 총리가 교육위 내용을 지켜본 뒤 김 부총리의 진퇴와 관련한 임면제청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청와대,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사전교감설도 흘러나온다. 이렇게 되면 노 대통령으로선 사퇴를 요구하는 거센 여론에 맞서 시간을 벌 수 있다. 김 부총리 진퇴와 관련한 정치적 부담을 어느 정도 덜수 있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김 부총리가 자진 사퇴를 할 시간적 여유와 명분을 주기 위한 묘수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핵심 당직자는 "여론의 판정이 끝난 '식물 부총리'를 조기에 정리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 데 대한 비난이 가중된다는 점은 정치적 손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정민.신용호.김성탁 기자<jmlee@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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