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50. 보석과 초음파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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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뇌과학연구소 전시관에서 조장희 소장(右)의 설명을 듣고 있는 필자.

나는 병원을 운영하면서 최신 의료장비에 관심이 남달랐다. 보다 좋은 의료시설로 환자를 완치시키고 싶은 욕심이야 의사라면 똑같지 않겠는가. 난 초창기 산부인과를 운영할 때부터 최신식 의료기기를 도입했다. 국내에 처음으로 초음파 기기를 들여오기 직전에 생긴 일화가 잊혀지지 않는다.

1970년대 초였으니 내가 마흔을 갓 넘겼을 때다. 어느 날 모임에서 한 친구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와서 자랑했다. 나와 친구들은 반지를 손가락에 껴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액세서리를 즐기지 않는 나였지만, 여느 여성처럼 반지의 광채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반지 주인인 친구에게 "야! 참 멋있다. 기가 막힌데…"하며 부러워했다. 그리곤 가격을 알고 놀랐다. 무려 3000만원을 호가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엔 '그만한 돈이면 첨단 의료기기를 들여올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지금도 귀금속엔 그다지 관심이나 애착이 없다. 최근까지도 아주 특별한 자리를 제외하고는 귀걸이나 목걸이 등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는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에 최초로 초음파 의료기기 네 대가 도입됐다. 일본의 알로카사가 만든 태아 심박동 청진기였다. 가격은 4000만원 정도로 당시 화폐 가치를 감안할 때 큰 금액이었다. 결단을 내려 그중 한 대를 내가 운영하는 산부인과에 들여왔다. 나머지 세 대는 국내 최고 권위의 대학병원과 대형 종합병원에 설치됐다.

이 같은 고가 장비 도입은 수익성을 따진다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도입을 결정한 이유는 한 가지다. 태아의 건강 상태를 잘 알 수 있고, 이를 가족에게 설명하는 데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병원에 설치한 초음파기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들의 기대와 호기심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태아의 심장 소리와 건강 상태를 알려주면 환자와 가족들은 너무도 신기해하면서 고마워했다. 8주쯤 지난 태아의 심장 박동 소리가 초음파기를 통해 "쿵쾅, 쿵쾅"하고 나오면 엄마는 뱃속의 생명체에 대한 신비감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어떤 보호자는 아기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집에 가서 다른 식구들까지 데려와 다시 한번 들려달라고 졸랐다. 초음파기에서 나는 소리를 확성기를 통해 대기실에 들려주면 "저게 두 달 된 아기의 심장 뛰는 소리래"하며 더 크게 틀어달라고 아우성칠 정도였다.

첨단 장비에 대한 애착은 남달라 기회만 되면 다른 대학병원에 뒤질세라 도입했다. 79년과 87년 각각 들여온 감마카메라와 뇌정위 수술기계는 3억원을 호가했다. 당시엔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지난해엔 첨단 진단장비인 64MDCT도 국내 처음으로 우리 병원에서 선보였다. 인체 단면을 3차원 영상으로 1초에 64장이나 찍는 고가 장비다.

의료장비는 나에게 보석보다 소중하다. 세계 최초로 'PET-MRI' 퓨전영상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뇌과학연구소의 연구 성과가 나타나면 이제 뇌속까지 손바닥처럼 보는 시절이 오리라 기대한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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