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혜적 절충이 기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구체인 현안의 절충보다는 최근의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상호 인식의 접근과 협력 관계의 재확인에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개방·개혁 정책의 추진과 함께 동구권의 급속한 변모, 소중의 관계회복, 일본사회당의 급격한 부상 등 최근의 국제정세는 유럽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각 국의 민족주의적 이익추구 경향이 노골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한 인식과 대응을 서로 타진하고 관계를 강화할 필요성은 한미 양국에 다 있다고 볼 수 있고, 특히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정세 변화는 미국에 있어 한국의 위치가 더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정상 수준에서 논의할 특별한 현안이 없는데도 이 시기에 노 대통령의 방미를 요청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이 양국의 맹방관계를 재확인하고 주한 미군과 한미연합 방위능력 수준의 유지를 합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계속적인 양국 협력의 큰 테두리를 확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양국 간의 만성적 현안이 되고 있는 통상문제와 방위비 분담 문제는 이번에도 상호 입장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친 듯하다. 미 측은 농산물을 포함한 한국시장의 개방과 방위비 부담증가를 요청했고, 이에 대해 우리측은 점진적 개방과 경제성장에 따른 적정수준의 부담증가라는 종래의 입장을 고수했다. 노 대통령의 방미에서 혹 미 측의 개방압력이 다소나마 완화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 사람이 있다면 이런 결과는 실망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개방과 방위비 부담증가는 시기와 범위의 차이는 있다해도 우리에게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는 이상 정상회담에서 돌파구를 기대하기는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던 게 사실이다.
앞으로도 개방속도와 부담증가액을 놓고는 양국 간에 논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노 대통령이 약속한 「4, 5년 내 OECD 수준까지의 개방」과 방위비의 추가부담이 우리 경제력과 국내 정치·시국상황으로 보아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양국의 국익이 충돌하는 이런 문제는 결국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양보나 희생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미 측의 압력으로 우리측이 양보하면 국내 반미감정의 심화·확산이 필지의 일이고, 반대로 우리측이 요지부동으로 나갈 경우 미국 내 대한 여론이 나빠질 것이다. 어느 경우라도 양국 관계에 좋을 리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양국 국민이 서로 참을 만한 수준에서 점진적으로 절충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이런 이해를 서로 깊게 했기를 바라면서 미측이 보이고 있는 성급한 개방압력이 이번 정상간 의견교환을 계기로 우리 국민에게 보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수준으로 달라지기를 촉구한다.
통상문제에서 보듯 한미관계도 결국 국민대 국민의 관계가 본질적인 것이다. 양국 정부간의 관계는 수십 년 간 변함 없이 돈독하고 서로 이해 못하는 문제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볼 수 있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좋다가도 나빠지는 것이 국민간의 관계다.
무슨 문제라도 이가 되면 좋고, 손이 되면 감정이 악화되는 국제적 경제 민족주의 경향은 한미간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한미 양국 정부는 손익에 따라 호감·반감이 왔다갔다하는 단순논리가 양국 국민간에 만연하는 현상을 경계할 필요가 있으며, 서로 꾸준한 접촉과 함께 자국 국민과 업계를 설득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사적 역할과 관련해 한국민의 심정을 헤아리고 의회와 자국민을 설득하는 미국 정부의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이번 정상회담의 의의를 이런 점에서 찾아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