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무덤덤한 부부 사이지만 그래도 ‘건강하세요’ 새해 인사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혜은의 님과 남 (65)

남편이 출장을 떠난 주말입니다. 모처럼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라디오 볼륨을 한껏 높여 청소를 시작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거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음악이나 라디오의 볼륨을 먼저 높입니다. 그리고 환하게 집의 불을 밝히죠. 너무 조용하거나 어두우면 왠지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남편은 저와 정반대입니다. 일이 있어 늦는 날이면 집에 누가 있나 싶게 남편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에서 불도 밝게 밝히지 않은 채 조용히 머물고 있습니다. 낮은 조도에 조용함을 좋아하는 남편입니다.

서로의 기호가 이렇게 다르니 함께 있을 때면 서로가 불편하지 않은 중간지점을 찾으려 합니다. 많은 부부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겠죠. 조금씩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같은 공간에 머물며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서로의 기분이나 컨디션이 좋을 때면 아무 문제도 아닐 중간 지점 찾기가 어려울 순간에는 때때로 사소한 다툼의 근거가 되기도 하죠. 그러니 부부싸움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로 “당신이 한 게 뭐가 있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행복한 가정을 위해 많이 참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당신은 나만큼은 아닌 것 같다는 질책인 셈입니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녀는 결혼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라면서 각자 자신만의 결혼에 대한 신화들을 쌓아간다. [사진 pxhere]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녀는 결혼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라면서 각자 자신만의 결혼에 대한 신화들을 쌓아간다. [사진 pxhere]

부부를 대상으로 가정에 기여하는 정도를 조사해보면 서로의 합이 100%를 훌쩍 넘어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여도 형성에는 여러 가지가 혼재해 있겠지만,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조사가 여럿 있습니다.

부부 1000쌍을 대상으로 가정의 재산을 형성하는 데 대한 기여도를 묻는 조사가 있었습니다. 이에 남편은 재산의 80%를, 아내는 재산의 70%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답했습니다. 각각의 기여도가 100%를 넘어 150%로 나타난 것이죠.

한 경제매거진에서는 지난 2017년 40대~60대 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먼저 현재 보유한 재산은 누구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중·장년 남녀 모두 ‘가족’이라는 답변을 먼저 내놨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생각의 차이가 있었는데요. 남성의 경우 본인을, 여성은 부부를 두 번째로 꼽았습니다.

이러한 설문조사는 부부 사이에 생각 차이가 크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민감한 부분이지만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 거죠. ‘에이, 부부 사이에 뭘’이란 머릿속의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부부가 많습니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녀는 결혼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죠. 자라면서 각자 자신만의 결혼에 대한 신화를 쌓아갑니다. 나라마다 다른 신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죠. 살아가면서 내가 만나는 남편, 내가 만나는 아내라면 이래야 한다는 정의가 나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집니다.

결혼을 결심한 사이라면 내가 가진 신화와 상대방이 가진 신화를 공유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아하, 그랬구나”, “어머, 그럴 수 있겠구나” 하면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는 거죠. 그 공간이 넓을수록 서로가 부딪히는 일이 생기더라도 바로 불꽃이 점화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유의 시간을 갖는 부부가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신화 속에서 다른 남편, 아내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고 그 횟수가 늘어가면서 사랑했던 그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감사하게도 부부 소통에 관한 글을 쓰면서 저에게는 남편에 대한 관찰의 시간이 늘었습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이해되지 않는 남편의 반응에 대해 이해하려는 생각의 시간이 길어졌죠. 그리고 내 생각과 남편의 생각에 차이점을 묻고 알아가게 됩니다. 다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차’하고 이제야 알게 되는 모습도 확인하게 되죠.

2011년 버지니아 대학이 만 18~46세 사이의 부부 혹은 이성 커플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가 있습니다. 그 결과 배우자와의 관계가 너그럽다고 생각하는 부부는 그렇지 않은 부부보다 결혼생활이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5배나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너그러움은 상대방의 옮고 그름이나 잘잘못을 세세하게 따지고 들지 않고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하죠. 연구에 참여한 버지니아대학 사회학과 브래드포드 윌콕스 교수는 이를 배우자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배우자를 알고 만족하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아내가 달콤한 모카커피를 좋아하는데 블랙커피를 가져다주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마이애미 밀러 의과대학의 앤서니 카스트로 정신의학과 교수는 이 연구에 덧붙여 배우자를 너그럽게 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당신은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결혼을 결심한 사이라면 서로의 신화를 공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진다. 그 공간이 넓을수록 서로가 부딪히는 일이 생기더라도 바로 불꽃이 점화되지 않는다. [사진 pexels]

결혼을 결심한 사이라면 서로의 신화를 공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진다. 그 공간이 넓을수록 서로가 부딪히는 일이 생기더라도 바로 불꽃이 점화되지 않는다. [사진 pexels]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매일 아침 커피를 내려준 남편은 억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등이 가려운 사람에게 뒤통수를 긁어준 다음 왜 고마워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 것처럼 나의 너그러움이 같은 기준에서 공유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연말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 한 부부의 차에 동승하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차 뒤편에 앉아 두 분의 대화를 듣는데 저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결혼한 지 20년이 훌쩍 지난 두 분이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며 나누는 대화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따뜻함을 전해줍니다. 물론 존댓말을 쓴다고 해서 상대를 아끼고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를 무시하며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만, 나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그 마음이 정말 전달되고는 있는지 확인하고 있나요?

카운트다운을 외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해 소원을 주고받습니다. 흔한 말이지만 ‘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 하는 말은 늘 빠지지 않는 단골 멘트죠. 가장 자주 만나면서도 어쩌면 가장 대화가 부족한 부부 사이. 너무 흔해서 굳이 하지 않았지만 흔해서 더 필요한 표현을 새해엔 한 번쯤 더 챙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굿커뮤니케이션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