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째 내 집처럼 드나들었는데"…연말 은행 지점 통‧폐합에 씁쓸한 충성고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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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던 학생이 여기 취직하고부턴 이 지점만 이용했는데….”

23일 오후, 서울 성북구 KEB하나은행 동소문지점 앞에서 만난 이길선(76‧여)씨는 다음달 지점이 없어진다는 소식에 허탈한 반응을 보였다. 이씨는 동구여상(현 동구마케팅고) 교사 재직 시절 가르쳤던 제자가 이곳에 취직한 뒤로 수시로 지점을 찾아 금융서비스를 이용했다. 이씨는 “그게 벌써 25년 됐다. 은행 직원들과 동네에서 마주치면 안부를 물으며 식구처럼 지냈는데, 아쉬워서 어떡하느냐”고 했다. 1995년 11월 문을 연 이 지점은 다음 달 문을 닫는다.

23일 오후 방문한 KEB하나은행 동소문지점. 1995년부터 영업했던 이 지점은 내년 1월 문을 닫는다. 성지원 기자

23일 오후 방문한 KEB하나은행 동소문지점. 1995년부터 영업했던 이 지점은 내년 1월 문을 닫는다. 성지원 기자

연말연초 시중은행의 통폐합이 잇따르고 있다. 내년 2월까지 신한은행은 지점 3곳과 출장소 3곳을, 국민은행은 지점 22곳과 출장소 15곳을 줄인다. KEB하나은행도 지점 16곳과 출장소 2곳을 통폐합한다.

거래가 드물거나 인근에 지점이 중복되면 영업점을 줄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만, 최근엔 금융 디지털화로 그 속도가 빨라졌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면거래 고객 비중이 줄다보니 직원도 줄었고, 자연스레 지점 수도 줄이는 것”이라며 “가까운 거리에 지점이 중복되거나 임대차 계약이 종료되는 곳부터 통폐합이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3년 간 은행별 영업점포 현황.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최근 3년 간 은행별 영업점포 현황.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1986년 문을 열어 34년째 영업 중인 서울 동대문구의 국민은행 신용두지점도 내년 1월이면 문을 닫는다. 이날 오후 만난 신용두지점의 ‘충성고객’ 들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신설동에서 식당을 운영 중인 제태순(65‧여)씨는 “식당을 오래 하면서 번 돈은 꼬박꼬박 여기 와서 예금했는데, 오늘 직원들이 ‘곧 지점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며 씁쓸해 했다. 제 씨는 “돈 맡기고 찾을 때 ‘뭐가 좋냐’며 (투자)상품을 편하게 물어보기도 했다”며 “이제 식당 근처에 지점이 있는 다른 은행으로 (거래은행을) 옮길까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모바일·인터넷 뱅킹이 대세지만, 휴대전화나 PC보다 대면거래가 익숙한 고령층에겐 아직 먼 얘기다. 이날 국민은행 신용두지점 앞에서 만난 허모(66)‧이모(60‧여)씨 부부는 “우리 같은 (나이 든) 사람들은 그런 거 알려줘도 할 줄 모른다. 수십 년 이 지점만 이용했는데 어떡하느냐”고 말했다.

KEB하나은행 동소문지점 옆에서 청과물 가게를 운영 중인 계미선(62‧여)씨는 휴대전화에 깔린 은행 애플리케이션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그는 “은행 직원들이 ‘지점 없어지면 이걸로 (거래)하셔야 한다’면서 직접 깔아줬다. 틈나면 가르쳐주는데, 익숙해지질 않는다”며 “급하면 내 집처럼 지점에 가서 물어보곤 했는데…”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금융당국은 지난해부터 은행 영업점 폐쇄가 금융취약계층의 소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해왔다. 이에 따라 지난 4월 은행연합회는 시중은행과 함께 은행 점포 폐쇄 시 영향평가를 실시하고, 대체안을 마련하는 ‘은행점포 폐쇄 공동절차’를 도입했다.

23일 오후 방문한 국민은행 신용두지점. 1986년부터 영업한 이 지점은 내년 1월 문을 닫는다. 성지원 기자

23일 오후 방문한 국민은행 신용두지점. 1986년부터 영업한 이 지점은 내년 1월 문을 닫는다. 성지원 기자

그러나 온라인 기반 금융서비스가 빠르게 발전하는 상황에서 점포 축소는 불가피하다는 게 업계 입장이다. 지난 9월 한국은행이 발간한 ‘2018년도 금융정보화 추진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금융거래(입‧출금 및 자금이체) 가운데 비대면 거래의 비중은 91.2%에 달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영업점을 줄이는 건 은행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오래 한 지점만 이용했던 고객들은 ‘불편하다’고 항의하니 곤란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날 만난 동소문동 주민 김모(70‧여)씨는 “이제 돈암동 지점으로 가야겠다”면서도 기자에게 “기사 나가면, 지점 그대로 유지하라고 할 수 있느냐”고 거듭 물었다.

성지원 기자 sung.ji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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