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8차 직접 조사한다는 검찰···경찰은 "숟가락 얹냐" 반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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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검찰이 직접 수사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경찰이 반발하고 있다. 경찰이 현재 수사하고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중복수사라는 지적과 함께 검·경간 수사권 조정 문제까지 언급되며 논란이 퍼지고 있다.

 지난달 13일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으로 복역 후 출소한 윤모씨(52)가 재심청구서를 제출하기 위해 법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13일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으로 복역 후 출소한 윤모씨(52)가 재심청구서를 제출하기 위해 법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스1]

검찰, 수사라인 피의자 입건 검토

수원지검은 지난 11일 브리핑을 열고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직접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형사6부(전준철 부장검사)를 전담수사팀으로 구성한 상태다. 진상규명을 위해 당시 검·경 수사라인에 있었던 인물들을 소환해 조사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들에 대한 피의자 입건 가능성도 내비쳤다.
검찰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옥고를 치른 윤모(52)씨도 지난 8, 9일 2차례 불러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부산교도소에 수감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춘재(56)도 수원구치소로 이감한 뒤 첫 조사도 했다.

 황성연 수원지검 전문공보관이 11일 수원지검 브리핑실에서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과 관련해 검찰이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히고 있다.[연합뉴스]

황성연 수원지검 전문공보관이 11일 수원지검 브리핑실에서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과 관련해 검찰이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히고 있다.[연합뉴스]

검찰은 8차 화성 살인 사건을 직접 조사하게 된 이유를 "윤씨의 수사촉구 의견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윤씨가 지난 4일 '이 사건과 관련된 수사 기관의 불법구금, 가혹 행위 등 직무상 범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관련 의혹에 대해 검찰이 직접 수사를 통한 철저한 진실규명을 요청'하는 수사촉구 의견서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받았다는 수사촉구 의견서는 '변호인 의견서'였다. 내용은 '이 사건에 대한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고 재심청구인의 억울함이 하루빨리 해소될 수 있도록 쟁점에 대한 사실 확인 및 판단들을 참고로 구체적인 의견서를 제출해 달라'는 것이다. 검찰은 이를 직접 수사해달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였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본부. [연합뉴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본부. [연합뉴스]

뒷북 공지된 이춘재 이감

검찰은 8차 화성 살인 사건을 수사할 방침을 세우면서 경찰과 의견 등을 조율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지난주 "부산교도소에 있는 이춘재를 수원구치소로 옮겨달라"고 법무부에 이감 신청을 했다. 그리고 11일 이춘재가 수원구치소로 옮겨질 때도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
이춘재를 조사하기 위해 부산교도소를 찾았던 경찰관들을 교도소 측으로부터 이춘재가 "수원지검으로 옮겨졌다"는 말을 듣고 당황했다고 한다. 검찰이 '8차 화성 살인 사건을 직접 수사하겠다'는 방침을 경찰에 알린 것도 11일 언론 브리핑 전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이 이춘재를 수사한다는 것을 알면서 이감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너무 한 것 아니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8차 사건, 이춘재 아직 피의자 입건되지 않아

검찰은 브리핑 전 이번 사안에 대한 언론 공개 범위를 정하기 위해 형사사건 공개 심의위원회를 열고 이춘재의 실명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공개 대상에서 얼굴은 제외했다. 이춘재의 실명은 이미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있지만, 수사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행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검사와 사법경찰관은 '피의자'에 한해 얼굴과 성명 등 신상 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 이에 경찰은 내주 중 신상정보 공개 심의위원회를 열어 이춘재의 실명과 얼굴 등 신상을 공개할지를 검토할 계획이었다.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모(52)씨가 지난달 20일 충북 청주시 운천동 NGO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모(52)씨가 지난달 20일 충북 청주시 운천동 NGO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이런 와중에 8차 화성 살인 사건 수사에 착수한 검찰이 먼저 이춘재의 실명을 밝힌 것이다. 더욱이 경찰은 이춘재의 DNA가 검출된 3차·4차·5차·7차·9차 화성 살인 사건만 이춘재를 피의자로 입건했다. 8차 화성 살인 사건은 이춘재의 범행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지만, 강압수사와 잘못된 국과수 감정 내용 등은 계속 수사하고 있는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8차 사건 피의자로 입건되지 않은 이춘재의 신상을 공개한 것도 너무 나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 중 '수사에 착수한 중요사건으로 언론의 요청이 있는 등 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어 형사사건공개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친 경우'는 피의자로 입건되지 않았어도 신상 공개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중복 수사의 배경은 수사권 조정?

경찰은 검찰의 직접 수사 방침을 사실상 '숟가락 얹기'로 보고 있다. 의견서를 핑계로 사실상 수사에 착수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검찰은 경찰이 제출한 이춘재의 자백 등 새로운 증거와 국과수의 기록 등을 검토한 결과 과거 수사에서 부실·조작 정황 등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이는 명백한 중복수사"라며 검찰이 직접 조사를 명목으로 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갈등 국면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가 아니냐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사건 초기부터 직접조사를 검토했으나 경찰이 재수사에 이미 착수한 점, 재심청구인 측도 일단 경찰 수사를 지켜보고 싶다는 의견을 낸 점 등을 고려해 그간 직접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윤씨 측이 여러 의혹을 제기하며 검찰 직접 조사와 재심 관련 의견을 신속히 제출해 달라는 취지의 촉구 의견서를 제출해 조사에 착수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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