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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를 운전사로 배정…전속계약 깰 사유 될까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용우의 갑을전쟁(17)

연예인들은 대부분 소속사 또는 기획사와 전속계약을 맺습니다. 연예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대형기획사 한두 개 정도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한때 기획사와 연예인 사이에 전속계약이 ‘노예계약’이라고 불릴 정도로 연예인에게 불리해서 법정 분쟁까지 번진 적이 있었지요. 이처럼 사회문제로 불거지자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서서 표준전속계약서를 개정하고 기획사들도 자진해서 전속계약을 수정한 바 있습니다.

흔히 전속계약 또는 연예 전속으로 불리는 계약은 ‘독점계약(Exclusive Contract)’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속기간(표준 약관상 7년 이하) 특정 기획사에 소속돼 예체능적 활동으로 노무 등을 제공하고 기획사로부터 일정한 보수를 받기로 하는 계약을 뜻합니다. 당연히 기획사와 연예인 사이의 신뢰관계를 전제로 하겠지요. 따라서 일단 전속계약을 체결하면 그 기간 연예인은 다른 기획사에 전속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하면 연예인은 기획사에 손해배상은 물론 막대한 위약벌까지 물어내야 할지 모릅니다.

한때 기획사와 연예인 사이에 전속계약이 ‘노예계약’이라 불릴 정도로 연예인에게 불리해서 법정 분쟁까지 번진 적이 있었다. [사진 pixabay]

한때 기획사와 연예인 사이에 전속계약이 ‘노예계약’이라 불릴 정도로 연예인에게 불리해서 법정 분쟁까지 번진 적이 있었다. [사진 pixabay]

그런데 기획사와 연예인들의 관계가 항상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속계약을 중도 해지해야 할 상황이 있겠지요. 전속계약이 해지 되면 그때부터 계약은 종료되지만, 그 이전까지는 유효합니다. 그런데 계약 해지 시점이 분쟁 요인으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전속계약서에는 한쪽이 전속계약을 위반하는 경우 다른 쪽에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가령 기획사가 약속한 매니지먼트 업무나 지원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경우, 출연료가 제대로 정산되지 않은 경우 등이 해당합니다. 법원은 기획사와 연예인 사이의 신뢰관계가 훼손돼 더는 전속계약을 유지할 수 없을 경우에도 전속계약 해지를 인정합니다. 신뢰관계 훼손 여부는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최근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선고된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대법원 2019. 9. 10. 선고 2017다258237 약정금).

방송 연예활동을 하는 여성 A는 2013년 7월 20년간 트로트 가수의 매니저 등으로 활동했던 B가 운영하는 기획사와 2020년까지 전속계약을 체결했습니다. B는 전속계약금을 지급하고 A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명목으로 약 1억1700만원의 비용을 자비로 지출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A가 출연한 CF 광고가 대박을 치면서 A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B의 동생이자 직원이 기획사 소속 가수에게 졸피뎀을 먹이고 강간했다는 범죄사실로 형사 기소됐고(추후 징역 3년 실형 선고돼 확정), 피해자가 직접 A를 찾아와 조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미성년이었던 A의 아버지 C는 2013년 11월 무렵 B에게 이를 항의하면서 ‘위 범행이 사실이라며 함께 할 수 없다’는 취지로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B는 동생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동생을 A의 운전사로 앉혔습니다. 더는 계약을 유지할 수 없던 A는 다른 기획사를 접촉하다가 C가 기획사를 직접 차린 이후 여기에 전속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B는 A와 C를 상대로, C는 B를 상대로 각각 형사고소까지 감행했습니다. B는 A 재산에 가압류까지 할 정도로 상황은 악화했습니다. 그러다 A는 2014년 6월 B에게 전속계약 해지의 내용증명을 보내며 사유로 매니지먼트 의무 불이행, 형사 고소 및 가압류, B 동생의 형사재판으로 인한 신뢰관계 훼손을 적시했습니다.

법원은 기획사와 연예인 사이의 신뢰관계가 훼손돼 더는 전속계약을 유지할 수 없을 경우에도 전속계약 해지를 인정한다. 신뢰관계 훼손 여부는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연합뉴스]

법원은 기획사와 연예인 사이의 신뢰관계가 훼손돼 더는 전속계약을 유지할 수 없을 경우에도 전속계약 해지를 인정한다. 신뢰관계 훼손 여부는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연합뉴스]

B는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자신은 전속계약을 충실히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A가 전속계약을 파기할 목적으로 C의 회사와 전속계약을 체결하는 등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었지요. 결국 B는 A를 상대로 수익금 분배와 연예활동으로 지출한 비용 및 위약벌을 달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대해 A는 오히려 전속계약은 C가 A에게 강간 기소 사건으로 항의를 했던 2013년 11월경 해지됐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C가 내용증명을 보낸 2014년 6월경 해지되었으므로 C에게 돌려줄 정산금은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법원은 먼저 쌍방의 신뢰관계가 더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고 보고 A의 전속계약 해지 주장을 인정했습니다. B의 동생이 강간 혐의로 기소된 데 따라 매니지먼트 활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본 겁니다. 여성이자 당시 미성년이었던 A의 연예활동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B로서는 응당 동생을 업무에서 배제키는 등 적극적인 조처를 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 고려됐습니다. B가 오히려 동생의 무죄를 강변하며 차량을 운전하게 하는 등 A의 인격권을 침해할 소지의 행동을 했다고 판단한 겁니다.

B는 그러나 동생이 A의 차량을 운전케 하면서 A의 아버지인 C 또는 어머니를 동승하게 하는 등 사전조치를 취해 염려하는 상황을 시정해줬다고 억울함을 호소했지요.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미성년 자녀를 둔 부모 입장에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 등을 이유로 B의 위약벌 주장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법원은 해지 시점에 대해 A 주장과 달리 판단했습니다. C가 B에게 ‘함께 할 수 없다’는 항의 표시를 한 것만으로는 명확한 해지 의사로 보기에 부족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A가 내용증명을 보낸 2014년 6월에서야 비로소 전속계약이 해지됐다고 봤습니다. 결국 전속계약이 유효하게 해지되기 전까지 A가 관리했던 수익은 지분비율에 따라 B에게 정산해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B가 자비로 지출한 1억1700만 원의 비용 역시 B의 손해로 보고 A가 B에게 이를 돌려주도록 했습니다.

결국 전속계약은 해지됐지만, 전속기간이 유지되는 동안 A가 관리하던 수익 일부와 B가 지출한 비용은 B에게 지급하는 거로 결론이 난 겁니다. 누구도 완벽히 승소하진 않은 겁니다. 다만 법원은 소송비용의 60%는 A가 40%는 B가 부담하라고 했습니다. 법원이 판단한 대략의 승소범위라고 보면 되겠지요.

법무법인(유한) 바른 변호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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