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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파국 면한 한·일 관계, 지금은 감정대립 부추길 때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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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유예가 발표되자마자 한·일 감정 대립이 또다시 점화되고 있다. 갈등을 관리하고 해결해야 할 양국 고위 당국자들이 감정 대립에 불을 붙였다.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과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 등은 24일 기자간담회에서 작심한 듯 고강도 일본 비판을 이어갔다. 익명의 고위 당국자는  “일본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언을 문제삼으며 “과연 양심을 갖고 할 말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정 실장은 “일본은 신의성실의 원칙을 위반했다”며 ‘견강부회’‘try me(할 테면 해 보라)’ 등의 비외교적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또 "일본 경제산업성이 합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왜곡 또는 부풀려 발표했고, (동시 발표 약속을 어기고) 한국보다 7∼8분 늦게 발표했다”며 "외교 경로로 이를 지적하고 사과를 받아냈다”고 밝혔다.

가까스로 대화 해결 기회 살려놓고 #자존심 싸움으로 또 다시 놓칠건가

일본 발표에 사전 협의된 내용과 다른 점이 있어 항의한 건 정부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고위당국자들이 감정적 언사를 날리며 가까스로 마련된 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누가 더 잘못했냐를 따질 때가 아니라 신뢰 회복을 위한 대화와 협상에 주력해야 할 시점이다.

정 실장이 "문 대통령의 원칙과 포용의 외교가 판정승을 했다”고 주장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지소미아 종료 유예는 한국이 양보한 것이란 게 객관적 평가에 부합한다. 백번을 양보해도 지금은 누가 이기고 졌는지를 따질 단계가 아니다. 미숙한 대응으로 혼란을 자초한 외교 실책에 쏟아지는 비판을 면하려는 발언이거나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정신승리’의 주장일 뿐이다.

일본의 인식에도 큰 문제가 있다. ‘일본 외교의 승리’라며 자화자찬할 때가 아니다. 한국 정부로 하여금 한·일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 지소미아 종료란 강수를 두도록 몰아간 일본의 잘못은 적지 않다. 누가 봐도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 성격이 강한 수출규제 카드를 꺼내든 것은 한국의 반일 여론을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놓고서 이제 와서 ‘퍼펙트게임’ 운운한다면 어느 한국 국민이 수긍할 것이며, 앞으로 있을 당국간 대화, 더 나아가 정상회담 성사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지소미아 파기란 시한폭탄의 시곗바늘은 일단 멈춰섰다. 그렇다면 대승적 차원에서 감정 대립은 접어두고 차분하고 진지한 자세로 문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국민 감정에 편승하며 갈등을 부추기는 초강경 대응은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이번 지소미아 파문으로 입증됐다. 고위당국자들이 이번 사태를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앞날은 더 암담할 따름이다. 그러니 외교안보 라인 책임자들에 대한 쇄신 여론이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