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독립을 위하여>
진주고 보 2학년 겨울방학이 가까워졌다. 나는 양복을 맞춰 입는다며 5원을 어머니에게서 얻어냈다. 사실 양복을 맞춘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어머니는 내말 이라면 무엇이든지 믿어주었다.
당시는 12월24일이면 겨울방학을 했다. 나는 드디어 그날 오후 4시반 진주발 부산행기차에 몸을 실었다.
집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삼낭률 에서 서울행 급행열차로 바꿔 탔다. 대구를 거쳐 대전 역을 지나니 기차안 사람들의 말씨가 달라졌다. 먼 곳에 온 것 같았다.
날이 밝아 창 밖을 내다보니 산과 들에 흰눈이 덮여 있었다. 진주에는 산과 들에 흰눈이 쌓이는 일은 별로 없고 12월에도 눈오는 일이 드문데 이곳은 추운 곳이구나 싶었다.
외투도 없이 겨울내복도 입지 않고 서울역에 내리니 추위가 온몸을 감쌌다 서울날씨가 진주에 비해 춥기도 했지만 호주머니 안에 돈이 1원 몇십 전 밖에 없어 마음까지 더욱 추웠다.
서울역을 빠져 나와 사람들이 많이 가는 데로 무작정 따라가니 전차 타는 곳이었다.
탄다고 탄 전차가 동대문 행이었다. 어디에 내려 어디로 갈까 정말 막막했다. 전차가 정거할 때마다 차장이 안내하는 말을 귀담아 들었으나 귀에 생소한 서울말이라 반밖에 알아들을 수 가없었다. 화신백화점 앞에 왔을 때 내리려했으나 경상도 사투리로 사람들에게 비켜달라고 할 수도 없고 차장에게 내린다고 기다려달라고 소리지를 수도 없어 내리지 못하고 그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어딘지도 모르고 걸어가니 극장이 보였다. 종로3가의 단성사였다. 그 옆 골목으로 들어가니 철원여관이 있었다. 여관에 들어가 방을 잡고 미리 진주에서 아버지 앞으로 써온 편지에 여관주소만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이제는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지 여관방에 누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나의 서울유학을 허락해줄지, 그렇지 않으면 잡으러 올는지 알 수 없었다. 여관방에 누워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여관 방문이 열렸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웬 처녀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일어나 앉았다.
「서울사람은 산사람 눈도 빼먹는다는데 무엇 하러왔나? 돈도 없는데…」속으로 중얼거리며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가방 속에서 편지지와 봉투를 꺼내 내 앞에 놓으며『보육학교에 다니는 고학생인데 사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쁜 여자가 아닌 것을 알고 우선 안심했다.
나는 원래 남이 부탁하는 것을 거절 못하는 마음 약한 사람이라 두말하지 않고 달라는 대 로 돈을 주고 사주었다.
「야! 서울 여자들은 여관에까지 다니면서 편지지와 봉투를 팔아 고학을 하는구나. 우리 집 에서는 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체조하는 것을 할아버지가 보시고 낯선 총각들하고 팔을 올렸다 내렸다 놀고있다고 퇴학시켰는데….참으로 촌에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또 방문이 열렸다.
이번에도 같은 옷차림의 처녀가 들어와 자기도 고학하는 여학생이라며 편지지와 봉투를 사달라는 것이었다.
『얼마냐』고 물으니 30전이라 했다. 양복 호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돈을 세어보니 1원 짜리 지폐 한 장과 10전 짜리 동전 두닢 밖에 없었다.
1원 짜리 는 헐지 않고 그냥 가지고 있으려 했는데 할 수없이 1원 짜리 지폐를 헐어 편지지와 봉투를 또 샀다.
「야! 이것 참 서울 처녀들은 다들 공부 열심히 하는구나.」나는 역시 남자나 여자나 서울에 와야 공부할 마음이 생기는구나 하고 감심하였다. 왠지 여자들까지도 열심히 공부하는 서울이 마음에 들었다.
서울의 석탄냄새까지 도회지 냄새로 여겨져 좋게 생각되었다. 이렇게 큰 도회지에서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과 형 친구들을 만나 독립 운동하는 길을 배울 수 있다는 꿈에 잠겨 부푼 기대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런데 또 문여는 소리가나고 다른 검은 두루마기의 처녀가 나타났다.
나는 아무말없이 30전을 내주고 이번에도 편지지와 봉투를 샀다. 방구석에 쌓이는 편지지와 봉투를 쳐다보며 포킷안을 생각하니 왜 그런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저녁밥상을 치우러온 여관보이가 여관비를 달라고 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일 아버지가 오시니 그때 주겠다』고 겨우 모면했다. 아버지가 아무리 일찍 오시더라도 모레가 돼야 오실 수 있는데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이 태산같았다.
그 이튿날에도 오전 중에 고학한다는 여학생 두 명이 또 찾아와 호주머니에는 이제 1전 짜리 네닢 밖에 남지 않았다.
점심때가 되니 배가 고팠다. 나는 배고픈 것은 참지 못하는 아이였다. 배고픔을 겨우 참고 있는데 또 고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방구석에 쌓인 편지지와 봉투를 가리키며『미안하지만 돈이 떨어졌다』고 오히려 사정했다.
돈이 떨어졌다고 하니 그 여학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콱」닫고 나갔다. 그 뒤부터는 한사람의 고학생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오전 내 방문을 여는 사람이 있었다. 깜짝 놀라보니 아버지였다.제1부>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6)|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 씨 사상편력 회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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