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한ㆍ미 방위비 협상 결렬을 놓고 미국 측의 ‘드러나지 않은 이유’가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19일 협상 시작 80분 만에 협상장을 나가버린 미국 측은 "한국과의 입장차"를 결렬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외교가에선 미국 행정부 내부의 기류에 향후 한·미 관계에 대한 계산까지 담겨있다는 분석이다.
①미 협상팀의 ‘트럼프 딜레마’
외교가 안팎에선 미국 협상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족시키기 위해 초장부터 무리수를 뒀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 측의 ‘50억 달러 청구서’는 전례가 없고 근거도 명확지 않다. 미정부 당국자들도 이를 알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50억 달러’에 꽂히면서 협상팀은 어떻게든 액수를 맞춰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요한 것은 항목이 아니라 총액이라는 것이다. 11차 SMA 협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한ㆍ미 협상팀 내부에서는 ‘T-리스크’(트럼프 리스크)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제임스 드하트 미 방위비 협상 대표로서는 한국을 상대로 증액을 끌어내는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도 만족시키는 이중의 임무를 해야 하는 셈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이 액수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은 미 정부 인사들도 알고 있다”며 “이번 결렬은 미 협상팀이 ‘우리도 이만큼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것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여주는 차원”이라고 말했다.
협상 결렬 강행한 미국 속내 세 포인트
19일 미 협상팀이 협상장에서 나온 뒤부터 언론에 준비된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불과 1시간 25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도 결렬 카드를 사전에 염두에 뒀다는 방증이다. 드하트 대표는 입장 발표에서 “우리는 필요하다면 우리의 입장을 조정(adjust)할 준비도 했다”며 한국에 책임을 돌렸지만, 실제 협상장에서는 50억 달러 주장을 양보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 외교ㆍ안보 소식통은 “드하트 대표가 대외적으로 발표한 취지와 협상장에서 말한 내용이 달랐다”고 말했다.
②대선 전 본보기는 한국뿐
내년 11월 대선 전에 방위비에서 성과를 보기 위해서는 한국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다는 인식도 미국 측은 갖고 있다고 한다. 한ㆍ미 간 협정은 올해로 종료된다. 전례를 보면 협상이 길어져 시한인 연말을 넘기는 경우는 있지만, 늦어도 다음 해 봄 무렵에는 타결이 됐다.
미국은 일본에도 분담금을 현재의 약 3배인 80억 달러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미ㆍ일 방위비 협정은 2021년 3월까지라 미 대선 전까지는 새 협정에 합의할 필요가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에도 분담 증액을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압박은 ‘2024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2%를 국방비로 지출하겠다’는 약속을 8개국 만 지키고 있다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결국 대선에서 방위비 문제를 활용하려면 한국과의 협상에서 성과를 거둬야 하고, 시범 케이스 격이 된 한국은 가장 모진 매를 맞게 된 셈이다.
③지소미아 종료 땐 ‘더한 공세’ 예고편
이처럼 동맹을 상대로 한 보기 드문 미국의 ‘벼랑끝 전술’은 22일 자정 만료되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과 관련, 한국이 종료 결정을 번복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시간차 공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미 행정부 관계자들을 만난 학계 인사는 “아직은 방위비 협상과 지소미아를 즉자적으로 연계하는 분위기는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지소미아가 실제 종료될 경우 방위비 부분에서의 거센 압박과 겹쳐져 ‘퍼펙트 스톰’이 불어닥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미 미국은 지소미아 종료를 미국의 한반도 방위 능력과 직결시키고 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 대사는 19일 언론 인터뷰에서 정부의 종료 결정에 대해 “한국을 방어하는 능력, 또 미군이 더 큰 위협에 처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이를 미국의 부담 증가라는 측면에서 방위비와 연결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유지혜ㆍ이유정 기자 wisep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