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판 유전 '반강제 회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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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민족주의 열풍이 카스피해에 거세게 불고 있다. 원유와 천연가스 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은 외국 기업들이 갖고 있는 유전과 광산 지분을 속속 거둬들이고 있다. 원유와 광물 값이 치솟아 외국 기업들이 큰 이익을 챙기는 데 대한 반작용이다. "우리 땅에서 캐내는 자원인데, 원자재 가격이 오른 덕을 너희만 보느냐. 우리도 이익을 올려야겠으니 지분을 더 넘겨라"는 주장이다. 대가를 주고 지분을 되사들이겠다는 것이지만 강제성이 짙다. 그 나라에서 원유를 채굴해야 하는 외국 기업들로서는 협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 남서부의 유전 도시 우젠 거리에서 맞닥뜨린 '우젠의 석유는 조국의 부강을 위한 것이다'는 내용의 플래카드(左)에서 카자흐스탄 정부가 석유 자원에 거는 기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오른쪽 간판에도 소중한 석유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우젠(카자흐스탄)=특별취재팀

중국이 된서리를 맞았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지난해 8월 중국석유천연가스총공사(CNPC)가 인수한 석유회사 페트로카자흐스탄의 지분 33%를 자국 국영 석유회사에 넘기라고 요구하고 있다. 당시 CNPC는 42억 달러(약 4조원)라는 거액을 들여 카자흐스탄 3위 석유업체인 페트로카자흐스탄을 인수했다. CNPC는 한동안 응할 수 없다며 팽팽히 맞섰다. 하지만 불편한 관계를 피하기 위해 지분 양도 협상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카자흐스탄 언론이 전했다. 페트로카자흐스탄의 지분을 중국에 판 캐나다 업체에도 불똥이 튀었다. 거액을 챙기고 파는 과정에서 세금을 탈루한 사실이 없는지 카자흐스탄 정부가 정밀 조사를 하고 있다. 지분을 처분한 지 벌써 1년 가까이 됐지만 이 회사 경영진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카자스흐탄에서 카스피해를 건너면 아제르바이잔이 나온다. 이곳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신규 분양하는 해상 유전에 대해서는 아제르바이잔의 국영 석유회사 소카르(SOCAR)가 지분의 절반을 차지하도록 명문화했다. 5월에는 아제르바이잔에서 터키의 항구 제이한으로 이어지는 1770㎞의 BTC(바쿠~트빌리시~제이한) 송유관을 완공, 가동에 들어갔다. 해외에 원유를 직접 공급해 '자원 판매 주도권'을 쥐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자원민족주의 흐름 때문에 한국이 이곳에서 확보할 수 있는 원유는 점점 줄고 있다. 일찌감치 이곳을 선점한 영국.미국.러시아는 물론 10년 전부터 중국까지 본격적으로 나서 유전개발권을 선점해 뒤늦게 뛰어든 한국이 먹을 '원유 파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자원민족주의 바람까지 불어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과 올 4월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을 각각 방문해 유전 공동개발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한국은 대통령 순방 후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카자흐스탄과 본계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2월 한국석유공사 등이 잠불광구 지분 27%를 갖는다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지만, 카자흐스탄 정부 관리는 "대통령이 방문했으니 (지분을) 주긴 주는데 쉽게는 못 준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는 후문이다. 고유가 시대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고 사 가라는 얘기다.

노 대통령이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했을 때 한국은 남부 이남 광구 지분을 최대 20%까지 넘겨받기로 약속받았다. 이 광구 지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소카르의 지분을 떼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 아제르바이잔 한국대사관의 이광철 대리대사는 "최근 소카르가 석유공사에 건넨 서류에선 10% 정도만 주겠다고 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알마티.우젠(카자흐스탄), 바쿠(아제르바이잔)=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 : 아프리카=권혁주 기자, 중남미=서경호 기자, 유럽.중앙아시아=심재우 기자,

캐나다=임미진 기자(이상 경제부문), 호주=조민근 기자(국제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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