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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스타 실화 영화 '블랙머니' 정지영 감독 “경제 공부됐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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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랙머니'로 돌아온 정지영 감독이 7일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화 '블랙머니'로 돌아온 정지영 감독이 7일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번에도 실화다. 지난 13일 개봉한 ‘블랙머니’는 정지영(73) 감독이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매각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7년 만의 신작이다. 고 김근태 의원 고문 사건이 바탕이 된 ‘남영동 1985’(2012)나 김명호 교수의 석궁테러 사건을 극화한 ‘부러진 화살’(2011)처럼 실화가 소재다. 게다가 이번엔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 국가간 소송(ISD) 판결 결과가 내년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에서 진행형 사건이다.

론스타 외환은행 매각 사건 다뤄 #열혈 평검사 '모피아' 실체 파헤쳐 #"우리 삶 영향 끼치는 실화 늘 관심"

물론 영화는 영화다. 예컨대 초반부 살인사건은 관객 몰입을 유도하기 위한 극적 장치일 뿐이다. 주인공 양민혁(조진웅)과 김나리(이하늬) 등도 허구 캐릭터다. 그런데도 현실을 환기시키는 고유명사(CK로펌, 뉴스탐사 등)가 잇따라 등장하고 엔딩과 함께 “단 한명도 구속되지 않은 사건”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픽션과 실제 사이 ‘팩트’가 궁금해질 법하다.

'부러진 화살' 이어 실화 소재…제작에 7년

“감독이 다 알려주면 무슨 재미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찾아보면서 경제 공부하게 되길 바란다. 수조원대 금액을 들먹이는 금융 사건이라 대중이 거리감을 느낄 법한데, ‘이해 가기 쉽게 잘 풀었다’는 평가가 가장 반갑다.”

지난 7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감독은 허구와 현실 사이의 모호함을 즐기는 듯 보였다. 1983년 감독 데뷔 이래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등 사회성 짙은 시대물로 이름을 날렸지만 일흔 넘은 나이에 글로벌 금융스캔들을 영화화 하는 건 그에게도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시작은 2012년 제작사인 질라라비의 양기환 대표가 제안하면서였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을 겸하고 있는) 양 대표가 스크린쿼터 투쟁 당시 외환은행 노조 및 민주노총 측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렇게 해서 들은 얘기가 보통이 아니었던 거다. 양 대표가 ‘이건 꼭 해야 한다’고 설득했는데, 너무 복잡한 이야기라 다른 시나리오 만지고 하느라 늦어졌다. 숱하게 감수 받고 엄청난 시행착오 끝에 현재 틀이 나왔다.”

금융스릴러 '블랙머니'(감독 정지영)는 좌충우돌 열혈 평검사 양민혁(조진웅)이 론스타 외환은행 사건을 연상시키는 금융 비리 실체에 접근하는 이야기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금융스릴러 '블랙머니'(감독 정지영)는 좌충우돌 열혈 평검사 양민혁(조진웅)이 론스타 외환은행 사건을 연상시키는 금융 비리 실체에 접근하는 이야기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조진웅 보며 윤석열 연상? 오히려 상반돼"

영화는 ‘막프로’로 불리는 열혈 검사 양진혁(조진웅)이 스타펀드의 대한은행 헐값 매각 사건이라는 거대 금융 비리의 실체를 파헤치는 과정을 담았다. 실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매각하기까진 2003년부터 2012년까지 9년이 걸렸지만 영화는 이를 금융위원회의 매각 결정 직전 수개월의 우여곡절로 압축했다. 주인공 양진혁을 ‘경알못’(경제를 알지 못함)으로 설정해 관객이 함께 금융 지식을 깨쳐가게 돕는다. 양 검사에게서 실제 론스타 수사에 관여했던 윤석열 검찰총장을 연상하는 이들이 있다고 운을 떼자 정 감독은 "하하" 웃었다.

“조진웅 풍채 보고 하는 소리 같은데 실제는 오히려 상반되지 않나? 양진혁은 평검사인데 윤 총장은 당시 이미 (대검 중앙수사부) 간부였다. 게다가 (서울대 법대 출신) 윤 총장이 소위 ‘진골’이라면 양 검사는 공대 출신으로 집안 사정 때문에 사법고시를 본 비주류다. 누굴 모델로 해서 만든 인물은 아니다. 양 검사는 자신이 절박해서 문제를 캐다가 사명감까지 가지게 된다. 히어로라기보다 코너에 몰렸으니 선택할 길이 그것밖에 없는 거다.”

영화 '블랙머니'를 제작한 정지영 감독이 7일 삼청동 카페 브리진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권혁재 기자

영화 '블랙머니'를 제작한 정지영 감독이 7일 삼청동 카페 브리진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권혁재 기자

‘부러진 화살’ 때도 그랬지만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감정은 분노다. 자신의 성추행 누명을 벗으려다 사건에 휘말리는 양 검사가 비리 실체에 다가갈수록 관객들은 그의 분노에 감정 이입하게 된다. 그의 동료 장 수사관(강신일)의 “고작 1600억을 대고 70조짜리 은행을 먹었다는 거네” 등의 대사도 이를 거든다.

이에 반해 “나라 경제는 우리가 책임져왔고 앞으로도 우리가 책임질 것”이라고 자부하는 이광주(이경영) 캐릭터는 감독이 생각하는 ‘모피아’의 전형처럼 보인다. 전직 총리 출신으로 CK로펌 고문을 맡고 있는 이광주는 대한은행 매각 과정에 깊숙이 ‘검은 손’을 드리우고 정계 커넥션을 통해 검찰 고위직 인사에도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에서 무능‧사악한 것으로 묘사된 정·재계 권력자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국가부도의 날도 선동 영화라는 비판이 있었다”고 했더니 “이번 영화에도 그럴 수 있겠지”라면서 여유 있게 답했다.

“영화에서 모피아 세력도 그들만의 명분이 있다. 내 소신이 ‘영화는 자기 철학과 세계관에 따라 보게 된다’는 거다. ‘남부군’(1990) 때 우파에선 ‘아니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려?! 얼마나 잔인한 놈들인데!’ 했고, 좌파에선 ‘빨치산을 저렇게 감상적으로 그리다니. 얼마나 강성이고 신념에 투철했던 이들인데!’ 했다. 작가나 감독이 ‘내 의도를 왜곡하지 말아라’라고 하는 건 어리석다. 나는 되도록 많은 관객이 재미있게 봐주길 원할 뿐이다.”

"감독 의도 따지지 말고 재미있게 봐주길"  

-극중 김나리(이하늬)의 선택 역시 불가피했던 거로 이해할 수도 있단 건가.
“김나리는 미국 엘리트들을 우습게 볼 정도로 당당하고 똑똑한 여자 변호사다. 자신의 선택을 얼마든 합리화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일단 그 선택을 하면 그 길로 굴러가게 된다는 거다. 역대 정권이 흘러온 게 그런 식이다.”

-검찰수사에서 ‘혐의없음’ 결론 난 것을 야합의 결과처럼 그린 건 사실 왜곡 아닐까.
“분명한 건 영화에도 나오듯 실제 이 문제로 구속된 사람이 없다. 잘못이 없어서가 아니라 검찰이 수사 성의가 없었던 걸로 본다. 론스타가 인수 자격이 없는 산업자본이란 게 뒤늦게 알려졌지만 책임진 사람이 없다. 게다가 외환은행 인수 직전 BIS 비율(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갑자기 바뀌게 된 진실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블랙머니'(감독 정지영)에서 냉철하고 이지적인 통상변호사 김나리(이하늬)의 선택은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블랙머니'(감독 정지영)에서 냉철하고 이지적인 통상변호사 김나리(이하늬)의 선택은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실화에서 작품 모티브를 계속 얻는데.
 “내 관심을 끄는 실화란, 사람들이 심각하지 않게 넘기는, 그런데도 우리 삶과 가치관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들이다. 그런 걸 만날 때 영화를 하고 싶다. 내 작업은 결국 힘 있는 자들, 기득권자들이 좀 놔주면 되는데 그렇지 않아서 생기는 비극을 짚는다.”

- 그렇다면 이제 와서 론스타 사건을 환기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
 “우리나라가 미국에 이렇게 당했구나, 그걸 이용해서 일부 고위 전‧현직 관료들이 해 먹을 수 있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랄까. 게다가 끝난 일도 아니다. ISD는 강한 나라 기업이 약한 나라 정부에게 가하는 것이고 이번에도 한국 정부가 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럼 물어줘야 할 돈이 5조원대라는데 이게 다 세금이다. 금융자본시대에 살면서 은행에 돈 넣고 잊어버린 채 함부로 살면 소수 기득권자가 우리를 농락할 수 있단 얘기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정 감독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인 한국을 약자 지위로 보는 시각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론스타 매각 지연에 대해선 오히려 국내 ‘먹튀’ 여론 때문에 정부의 합리적인 스텝이 꼬인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블랙머니'가 "잊혀질 뻔한 사건을 들춰내고, 시대의 환부를 건드리는 정지영 특유의 날선 감각을 확인하는 작품"(김혜신 영화평론가)이란 평가 또한 유효하다.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하면서 사법 불통을 비난했던 '부러진 화살'의 김 교수(안성기)처럼 "나는 국민으로서 고발한다!"고 외치는 양 검사에게서 통쾌함을 느꼈다는 관객 평도 줄 잇는다. 

73세 감독의 차기 작품은 경찰 관련 영화 ‘고발’(가제). 이번에도 수년 전 실화 소재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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