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순수성·용기 희명|베를린 영화제 대상수상 『붉은 수수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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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부의로 인해 감정이 상할 때는 그걸 삭이기보다 즉각 뱉어내는 편이 건강에 좋다.
중국영화『붉은 수수밭』은 인간의 용기, 건강한 저항정신을 그린 영화다.
쟝 이모우 감독은 단거리 선수처럼 상한 감정을 화면 가득히 밀어붙여 일순에 폭발시키고 있다.
그의 연출변처럼 이 영화에는「늙어 지친 현대 중국의 정신에 원시의 생명력을 불어 넣으려는」격한 감정이 분출하고 있다.
1930년대 중국의 농촌. 당나귀 한 마리에 팔려 문둥병 환자인 양조장주인에게 시집가는 츄알(공리). 겁탈마저 서슴지 않으며 그녀를 사랑하는 양조강 하인 유인(쟘웬). 그는 비적떼와 마적단으로 부터 츄알을 구해내며 끝내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까지 두고 살아가다 마을을 침략한 일본군과 맞닥뜨린다.
중국이 간직해야할 것은 츄알의 순수이고 그 순수를 지켜내는 중국의 힘은 유인의 용기라는게 쟝 감독의 뜻일 터이다.
붉은 수수밭은 중국민중을 뜻한 듯하다. 석양에 젖어 광활한 대지위를 물결치는 수수밭은 그들의 응집력을 상징하고 있다.
일본군이 수수밭을 망가뜨려 도로를 만들 때 마을주민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뽑혀 나감을 느낀다.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있는 그들에게 일본군 항일투사 류오한의 피부를 벗기라고 명령할 때 분노는 극에 달한다.
폭약을 담은 고량주 독을 안고 일본군의 기관총좌로 돌진, 자폭하는 모습은 현대 중국의 지친 모습에 대한 격렬한 분노처럼 보인다.
정지화면처럼 각인되는 원색의 영상과 반복되는 토속음악은 이 영화를 성공으로 이끈 최대의 힘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일군과 피의 제전이 휩쓸고 간 뒤 아내마저 잃고 살아남은 유인과 아들의 황혼을 등진 실루에트는 황혼 속으로 돌아가는 서부극의 히어로보다 의연해서 좋다. <이헌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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