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영광 살릴 영웅의 부활 꿈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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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칭기즈칸 군대의 기마 전술을 재현한 몽골군인들이 20일 세렝게의 초원을 질주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모래바람과 흙먼지 때문에 마스크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행사를 지켜봤다. [세렝게=강병철 기자]

800년 전 칭기즈칸 기마부대 병사 차림의 몽골군인들이 전투 재현 행사에서 검술로 일합을 겨루고 있다. [세렝게(몽골) AP=연합뉴스]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건국 800주년 기념행사에서 전통 기마병으로 분장한 병사들이 능숙한 기마술을 선보이고 있다. 8월 말까지 몽골 전역에서 각종 건국 축하행사가 펼쳐진다. [울란바토르 AP=연합뉴스]

울란바토르·세렝게=강병철 기자

칭기즈칸이 몽골제국 탄생을 선언한 지 800주년이 되는 올해, 몽골은 나라 전체가 칭기즈칸 열기에 빠져 있다. 시내 곳곳에 대형 동상을 세우는가 하면 호텔.술집 등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에는 빠짐없이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거리의 상인들은 연방 관광객들에게 칭기즈칸 얼굴이 그려진 보드카와 담배를 권한다. 수도 이름을 바꾸자는 논의도 벌어지고 있다. 울란바토르가 '붉은 영웅'을 뜻하는 공산주의 시대의 잔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칭기즈칸 시티'로 바꾸자는 주장이다. 1990년 공산주의를 버리기 전까지 70년간 몽골 정부는 칭기즈칸을 봉건 압제자로 규정하고, 그의 후손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 과거의 영광이여, 다시 한번=150년 넘게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칭기즈칸의 리더십과 전술은 8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파발마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과 기마부대를 이용한 그의 침략전술은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 도시와 세계를 넘나드는 21세기 노마드(디지털 유목민) 시대와 종종 비견된다.

여기에 칭기즈칸은 혈연을 무시한 능력 위주의 조직 운영과 전투마다 새로운 전술과 끊임없는 혁신으로 적은 군사로도 적의 대병력을 제압할 수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와 타임지는 이런 이유를 들어 지난 1000년간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한 바 있다. 현지에서 만난 한 일본인 관광객은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에서 오늘날 인구 270만 명, 1인당 국민소득 600달러의 극빈국으로 전락한 몽골 정부로서는 당연히 칭기즈칸과 같은 영웅의 부활을 꿈꾸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몽골 정부는 100억원 가까운 돈을 쏟아부으며 이번 전투 재현 행사에 총력을 기울였다. 행사 출연자들은 모두 현역 군인이다. 이들은 지난 1년간 칭기즈칸 기마부대가 800년 전에 받았던 훈련을 수없이 반복했다. 갑옷과 무기도 당시의 것을 고증해 만들었다. 몽골 정부는 이번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미국의 남북전쟁 재현 행사를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울란바토르에서 옷 장사를 한다는 다시 앤크만다흐(31.여)는 "큰돈을 들인 행사지만 낭비라고 생각하는 몽골인은 별로 없다"며 "공산정권 시대에 사라졌던 칭기즈칸에 대한 향수가 이번 행사를 통해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일본인 관광객 다카하시 데쓰야(60)는 칭기즈칸 기마군단의 신속성은 싸움터에 도착해 10분 안에 '게르(Ger.몽골 전통의 천막집)'를 짓는 데서도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주말에 게르에서 숙식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몽골의 전통문화를 좀 더 체험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 이어지는 축제 분위기=울란바토르 시내 '평화의 다리' 남쪽에 자리 잡은 중앙 경기장에서는 오전 2시 넘어까지 몽골 가수들의 공연이 이어졌다. 도시 곳곳의 술집과 호텔에서도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젊은이들이 몰렸다.

매년 7월 11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최대 전통축제 나담축제는 올해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됐다. '놀이'라는 뜻의 나담은 몽골의 전통놀이인 씨름과 말달리기.활쏘기 종목을 놓고 전국의 강호들이 몰려 자웅을 겨루는 행사다. 칭기즈칸이 13세기 초에 정복전쟁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3개 종목의 경기를 벌이며 병사를 격려하고 단합을 강조했던 것이 그 기원이다. 몽골 의회는 이번 나담행사를 앞두고 국민화합 차원에서 죄수 1590명을 사면하기도 했다.

울란바토르 외곽의 군사체험장을 찾은 외국 관광객들은 낡은 러시아제 기관총을 직접 쏴보고 탱크를 몰아보기도 했다. 일본인 관광객 후지타 야스히토는 "70년간 이어진 공산정권은 유사 이래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을 철저히 배제했다고 들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그의 존재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려는 몽골 사회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울란바토르.세렝게=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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