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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 WTO 분쟁 절차 막 올랐다…제네바서 국장급 첫 대면

중앙일보

입력

지난 7월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반도체 핵심 3대 품목 수출을 제한한 것과 관련, 양국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의 첫 분쟁 해결 절차에 돌입했다. 지난달 한국 정부가 일본을 WTO에 제소한 데 따른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일본 경제산업성은 11일 오후 5시(한국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양국 대표가 양자협의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정해관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협력관이 WTO 제소 관련 한일 양자협의 참석차 10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에서 출국에 앞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해관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협력관이 WTO 제소 관련 한일 양자협의 참석차 10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에서 출국에 앞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WTO 분쟁 해결 첫 단추…국장급 협의로 격상

당사국 간 양자협의는 WTO 분쟁 해결의 첫 단계다. 피소국은 분쟁해결양해규정(DSU)에 따라 양자협의 요청서를 수령한 후 10일 이내에 회신해야 하며, 30일 혹은 양국이 별도로 협의한 기간 안에 양자협의를 시작해야 한다. 일본은 한국 정부의 요청이 있고 난 뒤 9일 만인 지난달 20일 양자협의를 수락했고, 한 달째 되는 11일 이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양자협의는 WTO 분쟁 절차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여서 당장 의미 있는 합의안이 도출될 지는 미지수다. 일본이 과거 WTO에 피소됐을 때 양자협의에 불응한 적은 없었다. 교도통신은 “일본 정부는 이번 협의에서 (수출 규제를 강화한 것이) WTO 규정에 부합하는 적절한 제도 변경이라는 기존 입장을 설명할 것”이라며 “그러나 한국은 부당한 조치라고 주장할 것으로 보여 협의로 해결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고 전했다.

WTO 분쟁해결기구(DSB) 제소 절차.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WTO 분쟁해결기구(DSB) 제소 절차.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다만 양국이 과장급으로 진행되는 양자협의를 국장급으로 격상하는 데 합의한 만큼, 보다 진전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그간 일본 정부가 한국 측의 국장급 양자협상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과 대비된다. 일본은 수출규제 직후인 7월14일 일본 도쿄 경제산업성에서 열린 과장급 실무회의에서도 협상이 아닌 ‘사무적 설명회’라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사안이 중대하다는 양국 정부 합의에 따라 일본 역시 이번 만남을 국장급으로 정하는 데 동의했다.

한국 측 수석대표인 정해관 산업부 신통상질서협력관은 출국 전 기자들과 만나 “양자협의는 재판 절차에 들어가기 전 상호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찾는 자리”라며 “일본의 조치가 WTO 정신에 합치하지 않는 등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패 시 장기 소송…“日 차별금지 위반 입증 쉬울 것” 관측도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번 양자협의가 실패할 경우 양국은 WTO에 패널(재판관) 설치를 요청하고 1심 재판 절차에 돌입하게 된다. 이 경우 분쟁 해결 절차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유명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달 11일 일본 정부를 WTO에 공식 제소한 자리에서 “1심 패널 설치 절차에만 평균 15개월이 소요된다”며 “2심(상소)까지 갈 경우 분쟁이 2~3년까지 장기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말 분쟁 절차가 마무리된 ‘일본산 공기압 밸브 반덤핑 관세’ 건 역시 WTO의 최종 판결이 나오기까지 3년 5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가운데 일본 정부의 조치가 WTO 규정에 위반된다는 것을 입증하기는 쉬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2017년까지 8년간 WTO 분쟁처리기구 상급위원회(2심) 심의위원을 지낸 피터 반 덴 보쉬 스위스 베른대 교수는 11일 일본 NHK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수출을 제한한 3개 품목의 경우, 우대조치를 받는 국가가 한국 이외에도 존재해 차별금지 규정 위반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 정부의 조치가)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됐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조치가 WTO의 차별금지 의무(한 국가가 특정 국가에 부여한 가장 유리한 혜택은 제3국에도 동등하게 적용해야 하는 원칙) 위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국가 안보를 보호하기 위한 예외적 조치임을 주장(GATT 21조)할 것으로 보이지만 반 덴 보쉬 교수는 “WTO 회원국들은 이 규정이 남용되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며 “일본은 원자재가 북한으로 넘어가는 등 한국 기업이 (전략물자) 관리를 태만히 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분쟁 절차가 2심으로 이어질 경우 분쟁 해결이 어려워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중 무역분쟁과 관련해 WTO에 불만을 품은 미국이 2심의 새 위원 선출을 거부하고 있어 연내 가동 불능 상태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반 덴 보쉬 교수는 “소위원회의(1심)의 판단이 나오는 건 내년 이후가 될 것”이라며 “2심 심리를 진행할 수 없을 경우, 양측 모두 법적 구속력을 갖는 최종 판단을 얻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종=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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