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통과 30초 "이게 자유"|동→서독 엑서더스 현장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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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독 파사우서=배명복 특파원】13일 오후3시45분(현지시간) 오스트리아와 맞대고 있는 서독국경 슈벤 검문소. 9월이라 지만 한국의 늦가을처럼 조금은 쌀쌀한 날씨.
카키색제복을 입은 서독국경수비경찰과 세관원 10여명이 나와 오가는 차량들에 대해 간단한 출입국검사와 세관검사 등을 실시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쪽 국경검문소를 빠져 나와 서독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곳에 늘어선 20여m의 차량행렬 뒤로 동독승용차 한대가 멈추어 선다.
족히 10년은 넘었음직한 노란색의 낡은 승용차 안에는 30세 전후쯤 돼 보이는 젊은 부부와 엄마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는 어린아기 등 일가족 3명이 웅크리고 있다. 장시간의 여행에 지친 탓인지 약간은 피곤한 기색이지만 긴장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헤르츨리히 빌코멘.』(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서독경찰관 한 명이 환한 웃음으로 이들을 맞아 주며 서류 두 장을 나눠준다.
여권을 보자는 소리도 없고,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저 서독 쪽을 가리키며 고속도로를 따라 8km쯤 더 가면 적십자안내소가 있다고만 일러줄 뿐이다.
한 30초나 걸렸을까. 천신만고 끝에 동독 땅을 빠져 나와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오스트리아를 거쳐 여기까지 온 것에 비하면 이들이 그토록 꿈꾸어 왔던 서독입국은 너무도 싱겁게(?) 끝난 셈이다.
자신의 이름을 가르드(31)라고 밝힌 이 젊은 가장이 받아 든 두 장의 서류중 한 장(「동독에서 온 독일인을 위한 안내」)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되고 있었다.
「불확실한 여러 날들은 지나고 이제 당신은 기대했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우리는 당신이 서독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당신은 곧 새로운 고향을 찾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뜻대로는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이렇게 시작된 안내문에는 서독 땅에 첫발을 디딘 동독 인들에 대한 몇 가지 안내사항이 담겨 있었다.
차를 몰고 온 사람은 국경안내소에서 연료 티킷을 받아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계속 갈 수 있으며 갈 곳이 마땅찮은 사람은 임시수용소에 가 안내를 받으라는 등….
10일, 자정부터 시작된 동독 인들의 엑소더스 행렬은 11일과 12일 그 절정을 이루었고, 전날보다는 숫자가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가르드씨 처럼 뒤늦게 합류한 사람들로 13일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헝가리정부가 동독정부와의 마찰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국경을 열어 젖히면서 13일 정오까지 서독으로 쏟아져 들어온 동독인수는 무려 1만2천4백95명.
기자가 이들을 취재하기 위해 다뉴브강 상류 인구5만 명의 조그마한 국경도시 파사우에 도착한 13일 오전에는 이미 이들 중 9천5백 명 정도가 친지나 직장을 찾아 각자 갈 곳으로 떠났고 아직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3천명 정도만 파사우 등 국경주변 9개 지역에 설치된 임시수용소에 머물고 있었다.
파사우시 시민회관인 니벨룽겐홀을 임시 개조해 만든 수용소에서 만난 퀸츠씨(44)일가도 아직 갈곳을 못 정하고 남아 있는 케이스.
동독에서 식품회사 기계기술자로 일했다는 퀸츠씨는 보건소간호원인 부인 소나 여사(41)와 큰아들 스벤 군(16)과 작은아들 토스텐 군(10)등 일가족을 이끌고 지난 8월23일 고향인 드레스덴을 떠나 11일 새벽 이곳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2주일 이상을 부다페스트에 설치된 적십자수용소에서 지냈다.
파사우 시민들이 동독에서 온 어린이들을 위해 가져다준 그림책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토스텐 군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퀸츠씨는『이렇게 쉽게 서독 땅을 밟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동독에서 헝가리로 가는 게 어렵지 않았나.
『물론 여행비자를 받아야 한다. 경찰서에 신청하면 3주정도 걸린다. 그러나 여행할 시기가 휴가기간중이라는 사실만 확인되면 대부분 발급해 주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부모·형제·친척은 물론이고 동독에서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고 올만큼 서독에 오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점이 사실 가장 어려운 문제다.…내 고향은 영원히 드레스덴이다.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야겠지만 내가 지금 불법적으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앞으로 아마 수십 년이 걸릴 것 같다.』
-동독을 탈출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여행의 자유가 없다. 또 상하간의 의견교환이 제대로 안되고 상부의 지시에 따라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서독에서는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어디나 어려운 점은 있겠지만 그곳보다야 나을 것이다』
니벨룽겐홀 1층에 설치된 임시휴게실에는 파사우 주민들이 보내 온 수천 점의 옷가지들이 종류와 치수별로 진열돼 여름옷 몇 벌만 가지고 이곳에 온 동독 인들이 골라 가기를 기다리고 있고 또 서독전역에서 쇄도한 수천 건의 구인광고가 홀 주변 각 게시판과 벽면을 도배하다시피 뒤덮고 있다.「주택 무료제공」「행정절차처리 협조」「사회보장 철저 제공」등 갖가지 혜택이 경쟁적으로 덧붙여 있다.
각국에서 몰려든 취재기자들을 위해 임시 대변인 역을 맡고 있는 서독내무성의 디틀레프 플로토씨는 동독난민들에게 제공된 일자리수가 12일 현재 8천 건에 달한다면서 대부분 젊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라 이들이 직장을 구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니벨룽겐홀에 머물고 있는 약 2백50명의 동독난민들을 돌보기 위해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북적거리고 또 건물 밖에는 이곳 주민 수백 명이 나와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시내구경을 하기 위해 수용소 밖으로 나온 동독 인들은 주민들과 어울려 정담을 나누고 신기한 듯 거리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자유세계에 첫걸음을 내딛는 가슴 벅찬 순간들이다.
서독국경을 넘는 그 순간부터 서독시민과 동 등한 권리를 보장받는 동독인들.
이제 이들은 여행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또 자기가 갈곳을 정하고, 직장을 선택하는 것도 그들의 자유다.
그토록 갈망하던 서독 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들이 마음껏 호흡하게 된 것은 자유의 공기,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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