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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게으른 여행’에 의기투합…노마드 부부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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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50)

새벽 두 시에 깼다. 시차 때문에 비실거리다가 초저녁에 잠들어 지금 깼으니 이제 뭘 한다? 한창때는 낮에는 졸려도 버티고, 밤에는 안 졸려도 억지로 잤다. 그러나 이제 직장인도 아닌 마당에 귀찮거나 힘든 일은 사절이다. 낮이든 밤이든 졸리면 자고 안 졸리면 논다. 옆의 아내 역시 며칠째 시차 적응을 못 하더니 지금은 엷게 코까지 골며 잘 잔다.

부다페스트에 온 지 4일째다. 만일 이게 3박 4일 여행이라면 지금은 마지막 날 오전, 짧은 여행을 아쉬워할 시간이다. 돌이켜보면 바쁘던 시절에는 여행지에서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시간을 30분 단위로 쪼개 늦은 시간까지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아직 여행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낯선 곳에서 혼자 엄두가 안 나거나 혼란스러운 일도 두 명이 힘을 합치면 곧잘 해결된다. 만일 해결이 어렵더라도 마음에는 힘이 생긴다. [사진 박헌정]

낯선 곳에서 혼자 엄두가 안 나거나 혼란스러운 일도 두 명이 힘을 합치면 곧잘 해결된다. 만일 해결이 어렵더라도 마음에는 힘이 생긴다. [사진 박헌정]

첫날은 짐 풀었고, 이튿날은 숙소 주변을 혼자 어슬렁거리다 들어와 시차 때문에 늘어졌고, 어제는 아점 먹고 마트에서 식료품을 산 후 아내는 이틀간 밀린 업무 때문에, 나는 원고 쓰느라 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한 달 여행이란 게 이런 거군. 장소만 바뀌었지, 그냥 일상이네’. 역설적으로 ‘노마드’의 삶을 실현하는 기분도 좀 들었다.

엊그제 Vodafone 매장에서 스마트폰 유심을 교체했다. 10GB에 4만원, 꽤 비쌌다. 그런데 새 유심이 작동을 않는다. 교체해준 직원은 내 스마트폰의 로밍 문제이고 이미 물건을 뜯었으니 구매취소는 안 된다고 한다. 그의 역할은 판매까지였고 갈아 끼워 준 것은 서비스였을까?

기가 막혀 천천히 정확한 단어로 “나는 이 플라스틱 조각을 산 게 아니라 당신네 회사의 통신서비스 이용료를 낸 겁니다” 했고, 직원은 당황했다. 그런데 잠시 후 개통되었다. 어쨌든 갈등의 원인은 사라졌으니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내가 먼저 손 내밀어 악수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대립 자체가 피곤스러웠다. 돌아와서 아내에게 이야기하니 로밍과 전혀 상관없고 유심에 따라 개통에 시간이 걸리기도 한단다. Vodafone은 세계적인 업체인데 그 직원은 초보였나보다.

긴 여행을 하려면 여행 중에 일을 해야 한다. 아내는 노트북으로 어디서나 일을 처리할 수 있고, 나도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 물론 돈이 별로 안 되는 게 문제다.

긴 여행을 하려면 여행 중에 일을 해야 한다. 아내는 노트북으로 어디서나 일을 처리할 수 있고, 나도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 물론 돈이 별로 안 되는 게 문제다.

어제는 와이파이가 끊어져 노트북이 먹통이 되었다. 공유기와 씨름하다 결국 집주인에게 연락했다. 그는 기초적인 것부터 설명하려 하고,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자동 복구되었다. 그의 와이파이도 끊어졌다니 기지국 사정이었던 것 같다. 유심에 이어 시간이 해결해준 두 번째 사건이다.

대단치 않은 일이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언어적 불편까지 감수하며 맞서다 보면 일의 경중을 떠나 손톱 거스러미처럼 신경이 긁히는 기분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낯선 곳에서의 여유와 평화, 일상탈출의 행복감 같은,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은 여행의 맛을 즐기기 위한 일종의 대가일 수도 있다.

이럴 때 힘을 보태줄 사람은 아내뿐이다. 그런데 아내는 소머즈도 원더우먼도 아닌, 나와 비슷한 나이의 갱년기 중년여성일 뿐이다. 이 ‘여성일꾼’은 늘 나와 함께 있으면서 내 편이 되어 같이 인상 쓰고 같이 흥분해주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데, 어쩌면 그게 가장 크고 원초적인 힘이 된다. 여행 중 역할에 있어선 전체적인 기획과 진행은 내가 맡는데, 아내가 IT와 스마트폰을 잘 활용해서 큰 도움이 된다.

노부부가 오래된 자동차를 몰고 1차로를 주행하고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된 차, 안전하게 자기 속도를 유지하는 운전... 무욕의 행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노부부가 오래된 자동차를 몰고 1차로를 주행하고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된 차, 안전하게 자기 속도를 유지하는 운전... 무욕의 행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3년 전 처음으로 독일에서 ‘해외 한 달 살기’를 하고 돌아왔을 때, 친하게 지내던 후배 여직원이 찾아왔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라 나와 문학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는데, 그 역시 독일을 오랫동안 여행한 추억이 있어 화제가 여행으로 넘어갔다.

"20년 넘게 같이 산 부부는 여행 중에도 싸우지 않나요?” 신혼살림 중인 새댁다운 질문이다.
"그 집은 자주 싸워?"
"뭐 특별히 그렇진 않은데… 그런데 여행은 좀 다르잖아요. 오래 다니다 보면 고생도 하게 되고….
"고생할수록 더 미안해해야지, 왜 싸워?"
"네에에." 미덥지 않은 표정이다. 나를 말만 번지르르한 도덕군자로 봤을까.
"부부도 자기 영역이 있어. 우린 그걸 잘 지키는 것 같아. 물론 가끔 서로 워닝 트랙(Warning Track)에서 마주칠 때도 있지. 비무장지대 같은 거겠지. 그때는 좀 긴장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각자의 영역으로 물러나야겠지."

결혼 전까지 여행을 모르던 아내는 이제 여행 마니아가 되었다. 내 덕분이라며 고마워하는데, 사실 차려진 밥상에 수저 하나 더 놓았을 뿐이다.

결혼 전까지 여행을 모르던 아내는 이제 여행 마니아가 되었다. 내 덕분이라며 고마워하는데, 사실 차려진 밥상에 수저 하나 더 놓았을 뿐이다.

부부는 ‘한 몸’이 아닌 두 인격체다. 그러니 그때그때 결합과 분리가 적절해야 한다. 그러면 싸울 일도 없다.

결혼 전까지 여행을 모르던 아내는 이제 여행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내 덕분이라며 고마워한다. 사실 차려진 밥상에 수저 하나 더 놓았을 뿐이다. 설렘과 호기심으로 가려진 여행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불편함’이다. 우리는 그 낯설고 당혹스러운 느낌에 중독되어 호시탐탐 바깥으로 튀어나갈 생각만 한다. 그걸 위해 아내는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업무가 가능하도록 자기 일을 재설계했고 나 역시 퇴직 후 고비용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이주하여 노후자산 지출속도를 줄였다. 그러니 현재로써는 아내가 ‘여행 자금줄’이다.

새벽 네 시가 되었다. 아내도 눈을 떴다. 나는 지금 ‘바쁘게 살지 말자’면서 ‘벌써 사흘이나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갔네’ 하는 모순과 자책에 빠져있다. 어제 마신 보드카 때문에 뱃속이 마르는 느낌이다. 그런데 아내가 “아침에는 떡국 먹을까?” 한다. 흐흠, 헝가리에서 해장용 떡국? 좋지!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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