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사진전문기자의네모세상] 빗방울에 갇힌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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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 EOS-1Ds MarkII 100mm f8.0 1/4초 Iso400

억수장마가 산천을 뒤덮었습니다. 산을 깎아내리고 둑을 터트리더니 마을마저 삼켰습니다. 피땀으로 가꾼 논밭은 야속하게도 잠겼고 고단한 몸 누일 보금자리는 지붕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그나마 힘 있는 장정들은 세간 하나라도 건질 요량으로 안간힘을 쓰지만 겨우 몸만 피한 촌로들은 그저 발만 동동 구릅니다. 물이 생명을 살게 하는 원천이라지만 이 정도면 물 마귀란 뜻의 수마(水魔)와 다름없습니다.

우리 땅 곳곳의 아름다움을 찾아 소개하는 '네모세상'도 장맛비에 갇혔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아따 정말 징그럽소." "이놈의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보오." "엎친 데 덮쳤으니 어찌 살라고." "살다 살다 내 평생 이런 비는 처음이오." 물난리가 난 곳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하소연입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넋두리가 가슴팍에 아려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습니다.

지긋하게도 퍼붓는 장대비로 차창에 빗방울이 옹골차게 맺혔습니다. 초점을 물방울 속의 세상에 맞추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 보입니다.

논밭이 하늘인 양 위쪽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고 하늘은 아래쪽에 맥없이 깔렸습니다. 하염없이 논밭을 바라보는 촌로의 우산도 거꾸로입니다.

볼록렌즈로 세상을 보는 원리와 같습니다만, 마음 같아서는 물방울 속 풍경처럼 세상을 거꾸로 돌려놓고 싶은 장마입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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