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굴욕' 반복 없다…SLBM 꺼낸 김정은의 벼랑끝 압박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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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ㆍ미 실무협상을 5일 개최하기로 했다고 ‘나홀로’ 공개한 북한이 2일 오전 북극성 계열로 추정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발사했다. “4일 예비접촉에 이어 5일 실무협상을 미국과 하기로 했다”는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 발표 이후 13시간여 만이다. 공교롭게도 미국 동부시간으로는 국무부가 업무를 시작하기 직전엔 대화 공세로, 1일(현지시간) 업무를 마무리 시간에는 미사일을 날렸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미국과 협상에 나섰는데,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ㆍ미 정상회담 때까지 협상 직전엔 발언과 행동을 절제하며 미국을 의식했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북한과 미국의 실무협상 실무책임을 맡고 있는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연합뉴스]

북한과 미국의 실무협상 실무책임을 맡고 있는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연합뉴스]

원래 북한은 상대가 약점을 보일 때는 끝까지 이를 파고드는 늑대형 협상 스타일이다. 그러다 지난해와 올해초 북·미 회담에서 대북 제재 해제를 위해 나름 저자세를 보였다가 먹히지 않자 다시 ‘특유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정적의 뒷조사를 부탁했다는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탄핵이 거론되면서 국내 정치적으로 몰리자 이를 역이용해 압박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김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은 대화와 대결 모두 준비돼 있다고 주장해 왔다”며 “자신들의 뜻대로 되면 대화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군사적 긴장 고조를 통해 핵 실험 및 미사일 발사 중단이라는 트럼트 대통령의 치적에 상처를 입히고 재선 가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식의 압박”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만큼이나 민감하게 여기는 SLBM을 시험발사한 건 향후 더 한 게 준비돼 있다는 경고라는 의미다.

또 SLBM 카드는 ‘하노이 굴욕’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치밀한 준비와 계산의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북한은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때 트럼프 대통령이 결렬을 선언해 최고존엄의 지도력에 상처를 입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본인이 “이런 회담을 하려고 열차를 타고 60시간을 왔느냐”고 말했다. 이후 통일전선부 등이 대대적인 검열을 받았다. 이번엔 협상 발표 하루 만에 SLBM 추정 미사일을 쐈다는 점에서 이미 ‘먼저 발표→이후 발사’라는 시나리오를 준비했음을 보여준다. ‘하노이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단단히 대미 압박 카드를 마련했음을 시사한다.

이와관련 핵심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과 사전 협의 과정에서 자신들이 비핵화 조치에 나설 경우 미국은 상응조치를 확실히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의 상응조치를 전제로 실무 협상 개시에 나서기로 했고, 이같은 대응책은 이미 김정은 위원장이 승인했으며, 따라서 여기에서 더는 미국에 양보할 수 없다는 내부 방침을 정했다는 첩보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고위 탈북자는 “북한에서 김 위원장이 수표(서명)한 사안은 헌법으로도 수정 불가능한 절대적 조치”라며 “북한이 외무성과 군부를 동원한 입체적인 행동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작심하고 나섰는데 미국측 협상 당국자들은 신중한 분위기다. 북한은 4일 예비접촉을 한다고 발표했는데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는 2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만찬 등 외교일정을 잡았다. 협상장소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 제3국, 특히 유럽이나 동남아시아 국가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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