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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無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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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몇몇 지인들과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수년째 읽고 있다. 읽기가 지루한 시대도 있고 익히 아는 고사가 등장해서 흥미로운 시대도 있다. 가장 흥미진진했던 부분은 역시 진시황시대와 초(楚)·한(韓)이 각축하는 시대였다. 한 번은 ‘진시황 본기(本紀)’를 읽고 있던 중에 좌중이 크게 웃었다. 진시황 30년이었는데 단 한 줄 “무사(無事)”라고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한 번도 이런 해가 없었고 또 일이 없었던 해를 굳이 “무사”라고 기록한 경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건과 충격 없는 시대는 없어 #안팎의 충격 받아낼 힘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 나라’ 될수 있어

어떻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해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고 했을 것이요, 농사짓고 밥 먹고 울고 웃고 시집 장가를 갔을 것이다. 민초들에게는 그것이 큰 일들이었겠으나 사마천은 다만 역대 나라들과 그 나라를 움직인 사람들에 대해서 쓰고 있다. 황제와 왕과 제후들의 이야기, 그들이 벌인 권력투쟁, 그들이 내린 명령과 조치들, 그리고 많은 전쟁들의 이야기 등. 나라의 체제와 제도가 만들어지는 이야기,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신하들의 이야기도 간혹 나오지만 훨씬 더 많이 나오는 구절이 “누가 어디서 누구를 쳐서 얼마를 죽였다” 하는 기록이다. 몇 만의 목을 베었다는 것은 보통이고 십만을 죽였다는 기록도 간혹 있다. 그러니 “무사”라는 말이 생뚱맞을 수밖에. 어쨌든 진시황 30년, 백성들에게는 좋았던 한 해였으리라.

“무사”라는 말에 대한 느낌은 엇갈린다. “무사안일하다” 라고 말할 때에는 부정적이다. 특히 나랏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쓸 때는 그렇다. 이런 말을 듣는 정치가는 다음 선거에서 당선되기 힘들다. 그래서 한 지역의 수장이 되면 임기 중에 뭔가 가시적인 일을 남기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 고장의 숙원이던 다리도 놓고 자랑거리가 될 만한 축제도 만들고 기념물도 조성한다. 그러다 이따금 흉물을 남기기도 한다. 반면 “무사히 지내고 있어요.”는 긍정적인 말이다. 가족을 멀리 보내놓고 집에서 고대하는 단 한 마디가 이것이다. 또 가장은 귀가하면서 가족들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을 한다. 직장에서 상사와 트러블이 있었어도, 그 날 내렸던 결정을 후회하노라 마음이 무거워도. 그렇지 않으면 가족들이 걱정한다.

무사하다는 것은 음악에서는, 그리고 연극 같은 공연예술에서는 재미없다는 말이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연극은 볼 이유도, 만들 이유도 없다. 아무 일 없이 학교를 잘 다니는 아이의 얘기는 관객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해야 비로소 우리는 궁금해진다. 연극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음악에서는 그 시작하는 첫 마디(혹은 단락) 자체가 사건이다. “타-타-타-타안”하고 시작되는 베토벤의 ‘제5교향곡’이 좋은 예다. 그 시작의 강렬한 ‘사건성(事件性)’은 “이렇게 운명은 문을 두드린다”라는 설명을 낳고 그 교향곡의 제목까지도 ‘운명’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공연예술은 무사함과는 정반대로 진행한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새로운 내용이 밝혀지고 갈등이 노출된다. 반전이 이루어지고 갈등은 점점 더 격렬해지다가 결국 파국에 이른다.

그러나 연극과 음악이 일탈과 반전과 충격으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 일탈의 힘이 강해질수록 이를 극복하려는 다른 힘도 커진다. 회귀의 힘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힘이 승리하고 드라마와 음악은 평상으로 돌아와 끝맺는다. ‘극복되지 않는 파탄’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은 없다. 우리가 예술에 투영하려는 것이 그리고 그로부터 배우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충격과 그 충격을 소화하는 과정 혹은 원리,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연예술이 크게 발전한 시대가 실제로 전쟁이나 위기가 많았던 어지러운 시대가 아니라 평화롭고 건강한 시대라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하다. 격렬한 비극과 통렬한 풍자를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성숙하고 깊이 있는 시민들의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를 비롯한 3대 비극 작가가 활약했던 시기는 아테네의 정치 사회가 가장 안정되었던 시기였다.

사마천이 최근 몇 년 동안의 우리나라를 기술한다면 어떨까? 촛불 항쟁, 탄핵, 좌우 진영의 갈등, 젠더의 대결, 북핵과 남북 대화, 한일 간의 갈등 등 쓸 일이 많을 것이다. 어떻게 ‘무사’를 기대하겠는가? 다만 바라는 것은 그 힘, 그 역량이다. 안팎으로부터 닥쳐오는 충격을 받아낼 수 있는 힘. 물 위의 나뭇잎처럼 조그만 파문에도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운항하는 큰 배처럼 웬만한 파도는 맞받으면서 제 항로를 가는 것. “흔들리지 않는 나라”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