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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주의를 주의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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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

지난 겨울 썼던 ‘회의(會議)주의에 대한 회의(懷疑)주의’라는 칼럼에 대해 공감의 말씀도 많이 받았습니다만 비판의 말씀도 받았습니다. 회의란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으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필수 과정인데 왜 회의에 대해 반대하느냐고. 전적으로 동의하는 말씀입니다. 형식적이고 불필요한 회의로 인해 원래의 취지가 퇴색되곤 하니 제대로 된 좋은 회의를 하자는 뜻이었으니, 비판해 주신 말씀과 정확히 같은 의도였습니다.

주객 전도된 행사를 위한 행사 #의전과 형식으로 낭비하기보다 #실용적이고 의미있는 행사로

마찬가지로 행사를 위한 행사, 즉 행사주의(行事主義)를 주의하자는 취지는, 행사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의미있고 좋은 행사를 하자는 것. 한겨울 추위 속에 불필요한 회의로 고생하는 만큼이나 뜨거운 한여름에 불필요한 행사로 진을 빼는 경우가 많습니다. 행사주의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참석자 숫자가 성공의 척도가 되다보니 질보다 양이 추구됩니다. 관광버스를 이용한 조직적 동원도 있지만 개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한 품앗이식 동원도 이뤄집니다. 사람이 없으면 없는대로 진행하는게 행사에 대한 정직한 관심도를 알게 되는 것일텐데 가득한 행사장을 보며 셀프만족 정신승리를 하는 것이 행사주의의 특징입니다. 참, 주최측 추산과 경찰 추산 참석인원의 차이가 적은 투명한 신뢰사회가 어서 오면 좋겠습니다.

둘째, 귀빈들이 와야 성공적이라고 평가됩니다. 부작용으로 의전 문제가 동반되는데, 자리 배치, 내빈소개 순서 등에 대한 깊은 고뇌가 생기고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의전감각이 얼마나 있는가로 직장 내 능력이 평가되기도 합니다. 어렵게 순서를 정해놨는데 귀빈이 지각하면 소개순서에 혼란이 생기기도 합니다. 참고로 내빈소개가 대개 행사의 앞쪽에 있는건 아마도 내빈께서는 소개 직후에 ‘피치못할 사정’으로 먼저 나가시는게 당연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불손한 상상을 해 봅니다.

셋째, 행사주제와 관련된 전문가나 권위자, 최소한 행사에 대해서 할 말씀이 있는 분들을 모셔야 하는데, 어떤 일부 분들의 축사는 주최측에서 준비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정보 제공 정도야 어떻겠습니까만 때로는 스스로 찬양하는 셀프 축사가 됩니다. 처음 보는 원고를 읽다보니 자칫 잘못하면 몇 줄을 건너 뛰고 읽거나 한 장을 건너 뛰어도 모를 때가 있으며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눈치 못채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혹시 ‘이 대목에서 청중 박수’ 같은 지문까지 읽는 것은 아닌가 조마조마한 경우도 있습니다.

넷째, 행사 내용보다 사진 촬영이 중요합니다. 하긴 우리 시대 식사보다 음식사진을 찍는게 더 중요해져서, 음식 먹는 추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느냐, 사진을 찍기 위해 음식을 먹느냐 우선순위가 바뀐 세상이니 행사 사진만 가지고 뭐라 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사진만이 영원하다고 믿는 점이 행사주의의 특징임은 분명합니다.

다섯째, 행사 관련 낭비가 많습니다. 한번 쓰고 버릴 현수막, 모자, 티셔츠가 일회성으로 낭비됩니다. 물품 뿐만 아니라 인력 낭비도 큽니다. 우수한 인력들이 귀빈께서 드실 물, 간식, 필기도구를 정리하고 방명록 싸인 안내를 하는데 투입됩니다. 필기구 정도는 내빈들도 직접 가지고 다녀도 되겠고 물도 필요한 사람이 마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 외에도 많은 특징들이 있지만 지면 관계로 생략합니다. 그러면 좋은 행사란 무엇인가? 앞의 행사주의 특징과 반대로 하면 되겠습니다만 몇 가지 추려보겠습니다.

첫째, 무엇을 위한,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행사인가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세부사항들이 꼼꼼히 포함되고 실제로 달성돼야 합니다. 높으신 한 분이 그윽한 미소로 만족하는 행사가 아니라, 실제 일과 관련된 사람이 참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알려야 합니다.

둘째, 의전은 최소화해야 합니다. 정말 자존감이 높은 분들은 굳이 작은 행사에서까지 의전으로 대접을 받고 싶지 않을거라 기대합니다. 대표연설이 필요한 행사라면 어디 가든 비슷한 덕담을 하는 사람을 초청하는게 아니라, 그 자리만을 위한 특별한 연설을 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셋째,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성공이라는 셀프 정신승리에서 벗어나야 하며 목표 달성에 대한 엄정한 자기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일의 중요성과 의미를 널리 알리고 의기투합하기 위해 멋진 세레모니는 필요합니다. 형식적이고 불필요한 행사주의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원래의 목표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소문난 잔치엔 먹을게 있어야 합니다.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