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대 曰] 누가 누구를 흔드는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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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호 30면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워낙 큰 사건이 잇따라 터지다 보니 쉽게 잊히는 중요한 일들도 많은 것 같다. 바둑 천재 이세돌에게 패배를 안긴 인공지능(AI)의 충격도 빼놓을 수 없다. AI 기술이 인간의 지식수준은 물론 지혜의 영역까지 넘어선 것 아니냐는 진단도 나왔었다. 2016년 3월이었으니까 그리 먼일도 아닌데 벌써 까마득해 보인다.

미·중 패권전쟁 속 한·일 무역갈등 #역사·정치적 문제는 눈가림 일수도 #내부 힘 길러야 외부 힘 활용 가능

올여름을 뜨겁게 달군 한·일 무역 갈등도 얼마 지나면 아마 잊힐 것이다. 잊으며 사는 게 인생일지도 모른다. 모든 걸 기억한다면 아마 제대로 살지 못하지 않을까. 하지만 잊을 건 잊더라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겠다.

한·일 무역 갈등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데, 일본의 주장 속에서 그 단서를 찾아봤다. 반도체 핵심 부품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하면서 안보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일본이 수출한 반도체 부품이 한국을 거쳐 적성국으로 들어가 무기 제조에 쓰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 나온 반응은 왜 안보 문제를 끌고 들어가느냐는 식이 많았던 것 같다. 이 문제가 다 잊히기 전에 그 점을 좀 되짚어 보자는 얘긴데, 일본 주장의 핵심 키워드는 반도체와 안보라고 할 수 있겠다. 한·일 사이 갈등은 흔히 양국의 역사와 정치 갈등으로 간주되곤 한다. 실제 그런 측면이 많다. 이번에도 무관하진 않겠지만, 이번 경우엔 역사와 정치 갈등은 일종의 눈가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지능 대결’을 다시 생각해보자. 알파고의 승리는 4차 산업혁명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한국의 대중은 알파고를 통해 디지털 기반 4차 산업혁명에 눈뜨게 됐다. 선진국이 이미 4차 산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 전략을 짜고 있는 것까지 알아채기에는 인식의 차이가 컸다.

그러다 지난해 말부터 4차 산업혁명과 반도체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화웨이를 중심으로 IT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오던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가 본격화되면서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품목으로 AI·자율주행차·5G통신 등이 손꼽히는데, 여기에 반도체가 핵심 부품으로 사용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중에서도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는데, 이런 희소식이 더 있을 수 있을까. 메모리 반도체 강국인 한국의 장래는 밝아만 보였다. 1970년대에 이미 반도체를 한국의 핵심 상품으로 키워낸 ‘산업화 세대’의 안목이 새삼 놀랍게 보이기도 했다. 그런 ‘달콤한 전망’이 시작되는 와중에 한·일 무역 갈등이 불거졌다.

미국이 중국의 화웨이를 압박하면서 내세운 키워드도 반도체와 안보 문제였다. 반도체가 산업 발전의 핵심 부품이면서 동시에 군사 안보 분야에서도 중요한 품목으로 분류된다는 얘기가 새로운 지적은 아니다. 그쪽 분야에선 상식일 수 있다. 이런 흐름으로 보면 한·일 무역 갈등은 미·중 사이의 무역 갈등 혹은 패권전쟁을 배경으로 전개된 일종의 국지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국지전의 결말이 어떻게 나올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다만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이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패권은 미국과의 ‘동맹적 분업’ 관계 속에서 지속가능할 것 같다. 우리가 미국처럼 중국을 몰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한·미 동맹을 어느 때보다 튼튼히 하는 기초 위에서 중국과도 잘 지내는 지혜가 우리의 당면 과제로 보인다.

이병헌 주연의 영화 ‘달콤한 인생’은 흔들리는 버드나무를 소재로 제법 심오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스님. 흔들리는 것은 바람입니까? 아니면 버드나무 가지입니까?” “흔들리는 것은 네 마음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외부의 힘을 잘 활용하기 위해선 내부의 힘을 길러야 한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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