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에 너무 실망… 최고위원 사퇴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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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전남 순천 선암사의 팔상전에서 절에서 제공한 옷을 입고 참선하고 있는 한나라당 이재오 최고위원. 전당대회 뒤 당무에 불참하고 있는 이 최고위원을 설득하기 위해 강재섭 대표가 서울에서 내려와 참선이 끝나길 서서 기다리고 있다. 선암사는 1970년대 이 최고위원의 민주화 운동 시절 은신처였다. N Pool=광주일보 위직량 기자

한나라당 7.11 전당대회 이후 이재오 최고위원이 머물고 있는 전남 순천 선암사에서 14일 아침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지팡이 하나 들고 홀로 안개가 짙게 깔린 조계산에 올랐던 이 위원과 연락이 끊긴 것이다. 온몸이 축축해진 모습으로 6시간 만에 나타난 이 위원은 "앞도 보이지 않는 산을 종주하면서 내가 민주화 운동을 해 온 30년 삶을, 정치권에 들어온 10년간의 시간을 되돌아봤다"고 말했다.

그는"10년 동안 모든 것을 바쳐 일해 온 한나라당에 너무 큰 실망을 했다. 최고위원직 사퇴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전당대회 경선 내내 앞서가다 막판에 박근혜 전 대표 측의 맞바람에 밀린 이 위원은 박 전 대표에 대한 인간적인 서운함을 털어놨다. 그는 "나는 진심으로 박 전 대표를 모셨다. 6개월 동안 수천 마디 미사여구보다 진실한 행동으로 이를 보였다"고 밝혔다. 박 전 대표의 퇴임사를 지난달 준비한 얘기를 꺼냈다. 그는 "나는 원래 연설할 때 원고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그러나 박 전 대표의 환송사는 새벽에 일어나 한 구 한 구 다듬으며 정성을 기울였다"고 회상했다. "이런 나의 진심에도 불구하고 6개월 동안 의심을 풀게 하지 못했으니 결국은 내 불찰"이라고 했다. 전당대회 연설 도중 박 전 대표가 자리를 옮긴 것에 대해서는 "(투표를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나 다음에도 연설할 후보가 있었는데 (자리를 옮긴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전당대회 직후 박 전 대표 쪽을 거칠게 비판했던 것에 대해선 "선거 직후 통화여서 순간적으로 그렇게 표현됐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가 박 전 대표에게 했던 과거 발언을 문제 삼는 사람들을 향해선 "자신들은 과거를 꺼내지 말라고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남의 과거는 파먹겠다는 것 아니냐"고 화를 냈다. 박 전 대표 측의 전대 이후 태도에 대해서도 앙금이 남은 듯했다. 이 최고위원은 "오죽했으면 말을 신중하게 하는 이회창 전 총재가 '이재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했겠느냐"며 "그런데도 그저 이겼다고 도취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쪽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 위원은 이번 전당대회 과정에서 입은 가장 아픈 상처가 '색깔론'이라고 했다. "독재 정권이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할 때 덧씌웠던 색깔론이 동료들로부터 되살아날 줄 몰랐다"는 것이다. '남민전' 사건이 누명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 선거에 이기기 위해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을 참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그렇다면 10년 동안 나를 사무총장.원내총무.원내대표에 뽑아준 이유는 뭐냐"며 "결국 한나라당이 10년 동안 분칠을 해 온 것이 이번 전당대회로 추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래서 최고위원직 사퇴까지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이날 이 최고위원은 그의 당무 복귀를 설득하기 위해 선암사에 온 강재섭 대표를 만났다.

선암사는 그가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할 때 피신차 머물곤 했던 절이다. 이 위원은 이번 주말 지리산에 오르며 고민을 한 뒤 다음주 초 입장을 정리할 계획이다.

녹차로 유명한 인근 금둔사의 지허 주지스님을 찾아 나눈 대화에선 이 최고위원의 복잡한 심경이 엿보였다.

"뒤로 가는 한나라당을 앞으로 당겨야 하지 않나요."(지허)

"당에 정나미가 떨어지고 옷도 이렇게 입고 있으니까 머리까지 빡빡 깎고 싶습니다."(이 위원)

"지키는 사람이 지켜 가는 것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지키세요."(지허)

"허허허."(이 위원)

순천=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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