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한국에 눈과 귀 모두 가렸다”…강경 모드 장기전 태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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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달 20일 도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달 20일 도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총리) 관저가 핵심이다.”
지난달 말 일본의 외교소식통에게 한ㆍ일 관계 전망을 물으니 이런 답을 내놨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뜻이 워낙 강경하다는 의미다. 외무성 실무진에서 “그래도 한국과 외교 협의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한다. 2일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강행한 것은 아베 총리의 의중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화이트 국가는 대량살상무기로 전용 가능한 전략 물자를 일본 기업들이 해외 수출하는 과정을 간소화해주는 혜택을 받는다. 일본의 이번 조치로 반도체에 이어 전 산업 분야로 사실상의 수출 규제가 확산될 가능성이 열리게 됐다. 아베 총리가 쏘아올린 초강수 화살이다.

지난달 참의원 선거 유세에 나선 아베 총리. [교도=연합뉴스]

지난달 참의원 선거 유세에 나선 아베 총리. [교도=연합뉴스]

아베 총리의 한국에 대한 강경 모드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물이다. 이 같은 강경 모드를 아베 총리가 곧 거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게 양국 외교가 공통의 중론이다. 주일대사를 지낸 신각수 전 외교부 1차관은 “아베 총리가 여기에서 물러난다면 자신의 정치 지지 기반이 흔들린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한국에 대한 초강경 태세를 멈출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도 본지에 “장기전도 각오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아베 총리는 ‘끝장을 내겠다’는 생각”이라며 “한국에 대해 눈과 귀를 모두 가린 상태”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가 한ㆍ일 관계를 계기로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정치적으로도 아시아 지역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겠다는 계산을 끝냈다는 얘기도 나온다. 한국에 대한 초강경 모드를 자신의 외교 레거시(legacyㆍ유산)으로 삼고자 한다는 전망이다.

익명을 원한 전직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아베 총리는 한국과의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낸 총리로 기억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운 듯하다”며 “그를 바탕으로 동북아에서 미국과 연합해 중국에 맞서는 전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배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성공회대 양기호 교수도 “다시는 한국이 과거사 문제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못박는 것을 자신의 외교 목표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7일 서울 시민들이 일본의 수출규제에 항의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17일 서울 시민들이 일본의 수출규제에 항의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일본 정부는 아베 총리의 이러한 기조하에 치밀하게 전략을 짜고 기민하게 움직여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내상도 감내하겠다는 계산도 끝났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한국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 등이 벌어지고,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로 결국 일본 기업들도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일본 내에서도 나오지만, 아베 총리의 뜻을 바꾸기엔 역부족이라는 전망이다.

일본 근무 경력이 있는 전직 외교부 당국자는 “아베 총리는 이미 일본에도 역풍이 있을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한국에 소위 ‘본때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 정부가 더욱 치밀하고 영리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각수 전 차관 역시 “지금 와서 일본 정부와 아베 총리가 입장을 바꾸기를 앉아서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며 “한국 정부가 명분을 만들고 일본을 움직이는 지혜를 짜내야 한다”고 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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