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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경제 전쟁’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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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면충돌로 치닫는 한·일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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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다음 달 2일 각의를 열어 한국을 ‘백색 국가’ 명단에서 제외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한국 기업은 품목별로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재 대상이 3개 품목에서 1000개 이상 품목으로 확대되고, 한·일 기업의 기술협력에 대해서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한·일 ‘경제 전쟁’이 본격화하면 일본도 피해를 보지만, 한국이 더 큰 피해를 본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협상론에서 가르치는 원칙을 따를 필요가 있다.

식민지배 불법성 강조하는 한국 #원하는 게 배상뿐인지 불분명 #일본의 목적은 안보와 경제 이익 #통합 협상으로 상생 방안 찾아야

‘협상론 기초’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입장(Position) 뒤에 숨어있는 궁극적 목적(Interests)을 확인하고 협상하라는 것이다. 입장을 바탕으로 협상하면 답이 나오지 않지만, 궁극적 목적을 바탕으로 협상하면 양자의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일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하려면 양국은 물론 주요 관련국인 미국과 중국의 입장 뒤에 숨어있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양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명확하다. 일본이 식민 지배 자체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불법 행위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배상하라는 것이다. 1965년 한·일 협정에서는 민사상 손해만 다룬 것이기 때문에 불법 지배에 따른 형사상 책임은 아직도 남아있고,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하지 않으면 경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 전쟁을 해서라도 한국 정부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일본이 식민 지배를 불법이라고 자인하게 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얻자는 것인지,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금을 최대한 받아내 식민 지배로 피해 본 분들의 손해를 배상해주고 한을 풀어주자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심오한 목적이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를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한·미·일 3각 동맹’을 공고하게 해서 한국을 지키고 경제발전을 이루는 것이 목적일 수도 있고, 3각 공조를 깨고 중국과 동맹을 맺어 통일을 앞당기겠다는 것이 목적일 수도 있다.

일본 정부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한다.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한 적도 없고 배상한 적도 없는 영국·프랑스·독일·스페인 등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식민 지배의 피해를 배상하기 시작하면 한국뿐 아니라 대만·필리핀·베트남·미얀마 등 다른 나라 피해자에게도 배상해야 한다. 배상 금액을 감당할 수 없고, 집권당의 재집권 가능성도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하고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일본이 시작한 경제 제재에 맞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것을 보면 한국은 3각 동맹을 강화하겠다는 의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입장은 잘 알려져 있다.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할 수 없고, 한·일 협정으로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청구권 문제가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도 받아들일 수 없고, 한·일 협정에 대한 양국 간 해석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협정에서 약속한 대로 중재로 가자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경제 제재를 통해 한국에 고통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 징용, 식민 지배의 정당성 등의 문제는 한·일 협정과 과거 여러 번의 사과로 해결됐으니 과거 문제로 더는 싸우지 말자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 등을 키우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일본이 그런 산업을 키우려 하지 않고 있고, 한국에서 그런 산업이 성장하면 일본은 소재·부품·장비를 한국에 더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를 통해 한·미·일 3각 동맹을 강화해 중국의 팽창을 막고 북한의 핵무장을 억제해 자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일본이 한국에 하는 행동은 우방으로서의 신뢰가 깨졌으니 신뢰할 수 있는 우방 국가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달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한·일 알아서 풀라는 입장

미국의 한·일 관계에 대한 입장은 두 나라가 알아서 원만하게 해결하라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입장은 미군 주둔비를 더 많이 부담하고, 북한이 핵무장을 하지 못하게 미국을 도와주고, 대중국 제재에 동참하고,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데 군사적으로 지원하라는 것이다.

한·미 관계에서 미국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미·일 3각 동맹을 다져서 북한의 핵무장과 중국의 팽창을 막자는 것이다. 더 크게는 인도·대만·싱가포르는 물론 심지어 러시아와도 연합해서 중국을 포위하고 세계 패권을 유지하자는 것처럼 보인다. 한·일 갈등 상황에서 도와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제대로 부응하지 않은 것을 보면 미국은 자국의 궁극적인 목적 달성에 협력하지 않는 나라로 한국을 보는 것 같다.

만약 한국이 한·미·일 3각 동맹을 깨고 중국과 동맹을 맺겠다고 하면 미국은 어떻게 할까. 패권 유지를 위해 중국의 팽창을 막는 것이 미국의 궁극적인 목적이니 어떻게든 한국의 국력을 약화하려 할 것이다. 미국이 한국에 경제제재를 가하면 한국은 일본의 제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볼 것이다. 주한 미군이 철수할 것인데 북한이 한국 최대 도시 20곳에 핵폭탄을 쏘겠다고 협박하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매년 북한에 엄청난 조공을 바치거나 김정은의 지배를 받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있을까.

중국은 이번 한·일 갈등에 대해 공개적으로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다. 한·일간 경제 전쟁이 더 격화하면 중국도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겠지만, 장기적으로 ‘중국 제조 2025’에 도움이 될 테니 중국의 입장에서는 경사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한·일 관계 악화로 한국이 중국과 동맹하고자 한다면 중국은 궁극적으로 원하는 세계 패권을 더 빨리 쥘 수 있으니 쌍수 들고 반길 것이다.

통합적 협상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는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1978년에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다. 영토와 군사 주둔을 동시에 테이블에 올려 협상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점령했던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되,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에 군사를 주둔시키지 않기로 함으로써 양국이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

한·일 FTA도 협상 테이블에 올리자

한·일이 양국 관계에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한·미·일 3각 동맹의 강화를 통한 국가 안보 유지와 경제 성장이라면 통합적 협상을 시도해야 한다. 양국이 원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동일하니 쉽게 타결될 수 있다. 이때 하나의 사안만 놓고 협상할 것이 아니라 양국의 이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러 사안을 동시에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협상해야 한다. 일본과 아직 체결하지 않은 자유무역협정(FTA)도 못 올릴 이유가 없다. 각자가 꼭 필요로 하는 것을 얻고 덜 중요한 것을 양보하면, 협상 타결을 하지 않을 때와 비교해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양국이 과거사에 대해서는 더는 시비를 걸지 않는 궁극적 합의를 하면 좋을 것이다.

만약 한국 정부가 원하는 것이 3국 동맹을 파기하고 중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라면 협상 자체가 진행되지 않고 경제 전쟁이 본격화할 것이다. 정부는 경제 전쟁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해줘야 한다. 전쟁이 본격화하면 미국도 한국에 등을 돌려 더 큰 경제와 안보 위기를 경험할 것이다. 한국 정부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한·일 양국이 합의할 수 있는 대안을 찾지 못하면 과거라는 ‘꼬리’가 현재와 미래라는 ‘몸통’을 뒤흔드는 꼴이 된다. 과거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양국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경묵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한국인사조직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