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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장례 지원한 뒤 사망…법원 "과로로 지병 악화된 업무상 재해"

중앙일보

입력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울행정법원 [사진 다음로드뷰]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울행정법원 [사진 다음로드뷰]

사내 장례지원팀장을 맡아 동료의 장례식을 마친 회사원이 얼마 뒤 사망하자 그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달라”고 낸 소송에서 법원이 유족 손을 들어줬다.

이씨는 1987년 입사한 A사에서 생산업무를 담당해왔다. A사는 소속 근로자가 상을 당하면 직원들이 장례지원팀을 따로 만들어 장례식 지원 업무를 맡게 했다. 이씨는 2016년 2월 동료가 빙부상을 당하자 장례지원팀장으로 2박3일간 장례식을 지원했다.

그런데 장례가 끝난 다음 날 이씨가 복통 등을 호소하며 응급실에 입원했다. 하루 뒤 이씨는 급성 충수염(맹장 끝 충수 돌기에 발생한 염증) 수술을 받았고, 이틀 뒤 큰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다음날 사망하고 말았다. 평소 이씨가 앓고 있던 심부전증에 의한 심장마비가 원인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은 이씨에 대해 “충수염 수술 때문에 원래 앓고 있던 심부전이 악화한 것으로 보인다”며 업무상 재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씨의 유족들은 “기존 업무에 장례지원업무까지 맡으며 발병 1주일 전 동안 66시간 48분이나 일했다”며 업무상 과로를 주장했다.

서울행정법원 3부(재판장 박성규)는 이씨 사망을 과로로 인한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도록 판결했다고 8일 밝혔다. 산업재해보상법은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의 주된 발생원인에 겹쳐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켰다면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한다. 이 경우 평소에는 정상적인 근무가 가능했더라도 직무 과중으로 심부전증이 자연적 진행 속도 이상으로 급격히 악화했다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얼마만큼의 직무가 과중하냐를 따지는 기준은 산업재해보상법 시행령 고시에 정해져 있다. 이씨처럼 심혈관 질환이나 뇌혈관 질병으로 사망한 경우에는 ‘발병 전 1주일 이내 업무량이나 시간이 이전 12주간에 1주 평균보다 30% 이상 증가한 때’를 육체적ㆍ정신적 과로의 일차적 기준으로 본다. 이씨는 발병 전 1주간 66시간 48분을 일했다. 발병 전 12주 전체의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38시간 14분이었다. 법원은 이를 비교할 때 이씨의 업무시간 증가량이 30%를 크게 상회한다고 봤다. 또 이씨가 발병 3일 전부터 평소 하지 않던 장례지원팀 업무를 담당하며 동료들에게 수면시간 부족을 호소하고, 가슴 뻐근함을 토로하는 등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아온 점을 인정했다.

이씨의 진료의 등 의료진 4명이 “장례지원팀 업무에 따른 육체적 또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기존 질환인 심부전이 악화했고, 충수염 수술이 더해져 심부전이 더욱 악화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소견을 밝힌 점도 고려됐다.

법원은 “이씨의 업무와 사망 사이 인과관계가 없다고 판단한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취소한다”고 결론지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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