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화단의 대부 임천 화백|5일부터 그로리치 화랑서 개인전|"연변동포 생활상 화폭에 담아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겨우 다섯자(척)를 넘길수 있을까 싶은 단구의 그는 까슬하게 마른 얼굴에 그윽히 눈부터 웃는 모습이 여간 선량해뵈지 않는다. 정성들여 걸친 잔(세)체크무늬의 양복이 조금은 겉도는 인상인데 아마 품을 너무넉넉하게 잡았기 때문일것이다. 영락없이 첫서울 나들이길에 나선 초노의 촌부다.
임씨(54). 뒤로 길게늘인 난발만 아니라면 예술가의 풍도라고는 어느한구석도 찾아보기 힘든 그가 사실은 연변화단을 이끄는 대부와도 같은 존재이며 중국미술계를 통틀어도 작가로서는 결코 무시할수 없는 실력자의 한사람이라는 사실에 접하고는 누구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지난 6월30일 입국,『사람들의 골내지상을 빼곤 무엇하나 비슷한게 없어 숫제 서양의 어느나라에라도 온것같은』 낯선 고국에서 한달여를 보냈다. 서울·울산등지에 흩어져 사는 사촌동생들과 광주의 고모님을 찾아 그의 생후로는 첫상봉을 하고 줄곧 한에 겨운 눈물을 쏟아왔다고 했다.
『친척방문도 방문이지만 1주일정도 남겨놓은 고국에서의 개인전을 생각하면 그렇게 가슴이 설렐수가 없습니다. 서너달전 연변에 온 중앙일보관계자들이 제의해 이루어진 전시회로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동포들에게 저의 미술세계는 물론이고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아온 연변동포들의 생활상도 보여드리고싶습니다.』 입회자격을 얻기가 몹시 까다롭다는 중국미술가협회의 회원이자 길림성 화원의 부원장 직함도 갖고 있는 그는 15∼30일 그로리치 화랑에서 열릴 이번 개인전에 풍경·정물·인물등을 소재로한 유화 31점, 연변거주 한인교포들의 소박한 삶의 풍정을 담은 중국화 49점, 그리고 탄탄한 데생력을 과시하는 인물위주의 스케치 60점등 모두 1백40점을 출품했다.
만주 유이민의 아들로 용정노두구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에서 중학을 졸업하던 해인 51년 연길시로 나와 시립미술연구소에서 2년동안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았다. 미술연구소 수료후 58년까지 연길영화관에 배치돼 선전포스터와 간판을 제작하다가 59년 연변일보 촬영미술부로 자리를 옮겨 꼬박 20년동안 신문에 쓰이는 컷·삽화·현장보도 스케치·기록화 따위를 그렸다.
길림성 미술창작실 소속의 전업화가가 된것은 79년10월, 이 미술창작실이 79년 길림성 화원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부원장으로 임명됐다. 각성 단위로 구성돼있는 화원의 전업화가에게는 생활비는 물론 미술재료등 창작생활에 드는 일체의 비용이나 편의를 나라에서 제공한다. 길림성화원에는 소속전업화가가 16명 있는데 그중 한인은 그와 얼마전전시회 관계로 서울을 다녀갔던 장홍을씨 둘뿐이다.
그는 56년 유화 『탈곡양』 으로 제1회 길림성청년미술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 지금까지 국가급 전람회에서 12회, 성급전람회에서 70여회나 입상하는 화려한 경력을 쌓아왔으며 북경의 중국미술관·민족문화궁등에 작품이 소장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있는 작가의 한사람이다.
『1년중 3개월은 농촌이나 공장등지를 직접 돌아다니며 창작을 합니다. 기층민들의 삶에 밀착하여 보다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서지요.』 현장스케치를 의해 지난 10여년간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 1천리길을 모두 뒤져 답사했고『그야말로 연변 구석구석마다 발길 닿지 않은긋이 없다』며 웃는다.
작년8월에는 8명으로 구성된 화가 시찰단의 일원으로 약2주일동안 북한을 방문했는데 그들이 개발해낸 조선화는 내용상의 단조로움은 있지만 예술적 기교나 형식면에서는 배울점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모두 보지는 못했으나 한국의 미술은 매우 개방적이고 표현형식도 다양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만 전통적인 점이 부족해 국적을 의심하게하는 그림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게 조굼은 안타깝더군요.』 이번에 함께 고국에 온부인 김해숙씨(51)와는 지난 61년 결혼, 슬하에 화(28) ·파(26) 두아들을 두고있는데 차남 파가 그의 뒤를 이어 금년 연변대학미술학부를 졸업하고 직장배치를 기다리는 중이다.
9월말게 연변으로 돌아갈 예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