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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뭐 어때, 반팔 셔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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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현경 기자 중앙일보 기자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이솝 우화 속 태양도 이건 못할 것 같다. 내 친구들 반팔 셔츠 입게 하기. “얼마나 더워야 반팔 입어?” “야, 안 더워서 안 입는 게 아냐. 아재 옷이라 못 입는 거야.” “그럼 몇 살부터 입을 거야?” “글쎄, 결혼하면 입으려나? 아내가 싫다고 하면 안 되겠지만….”

구글 검색창에 ‘반팔셔츠’를 쓰면 엔터 키를 누르기 전에 ‘반팔셔츠 극혐’이 추천검색어로 뜬다. 한 자 더 치면 ‘반팔셔츠 아재’도 나온다. 3단 논법을 적용하면 반팔셔츠는 아재이고 아재는 극혐이니 반팔셔츠는 극혐이란 뜻이겠다.

봄에 입던 셔츠를 여름에도 활용하는 자세는 높게 사야겠지만, 최고기온이 30도를 넘어도 팔 세 번 접는 게 유일한 여름나기 대책인 친구들을 보면 이게 남자들의 코르셋인가 싶다. 마주한 누구라도 ‘너 덥구나!’를 알아차릴 얼굴에 온몸으로 더운 숨을 몰아쉬면서도 ‘너 아재구나!’만은 피하려 긴팔에 갇혀 있다면 말이다.

여자들의 코르셋은 대개 조이거나 옷감을 아껴 몸을 더 드러나게 한다. 남자들의 코르셋은 반대로 가리는 게 격식이다. 한겨울에도 미니스커트 아래로 다리를 드러내는 게 여자들의 ‘멋’이라면, 한여름에도 셔츠와 타이와 양말과 구두를 갖추는 건 남자들의 ‘멋’일까. 팔 중간부터 손목까지 딱 한 뼘 반 더 내놓는 일은 ‘나는 아재인가’ 고뇌하는 친구들에게 무척 힘든 일이 돼 있다.

코르셋의 본질은 ‘맞춰짐’이다. 옷이 나를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옷에 욱여넣어 진다. 내가 싫다고 버둥거려도 타인이 끈을 조일 수 있다는 건 특히 문제다. ‘화장은 예의’ ‘반팔은 극혐’ 같은 시선들은 매듭이 돼 숨통을 조인다.

겨울에도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음료)’를 외치는 게 취향이듯 여름에도 긴팔이 좋으면 입으면 된다. 다만 내 취향 아닌데 땀 흘리며 에스프레소 마실 필요는 없다. 유튜브에 ‘X-세대 패션’을 치면 1994년에 한 시민이 이런 명언을 남긴 뉴스가 나온다. “제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요.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입었을 때 기분 좋은 옷을 입읍시다, 시원하게.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