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35. 백령도 6년6개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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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길병원에서 원격 화상시스템을 이용해 진료 중인 의료팀을 격려하고 있는 필자.

우리의 땅 백령도. 국내 최북단 낙도인 그 섬을 떠올리면 아직도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지금도 내 기억에 백령도에서 배로 후송됐던 절박한 환자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1970년대 산부인과를 운영하던 시절, 한 임신 여성은 자연유산으로 출혈이 멎질 않자 급박하게 나를 찾았다. 인천에서 220㎞ 떨어진 백령도에서 꼬박 하루가 넘게 걸려 도착한 환자였다.

혈압과 맥박도 잡히지 않았고, 온몸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다. 긴급 수혈이 시작됐고, 나와 의료진은 극진하게 그녀를 보살폈다. 의학적으론 이미 죽은 생명이었지만 그녀는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발그스레 혈색을 되찾았을 때 병원은 기쁨과 보람으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1994년 나에게 백령적십자병원 인수 제의가 왔다. 이 병원은 1960년 선교를 목적으로 미국의 마뎃(한국명 부영발) 신부가 세운 성안드레병원이 모태다. 그 뒤 정부의 서해 5도 주민 지원책의 일환으로 대한적십자사가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십자사도 정부지원 감소로 적자가 쌓이자 93년 복지부에 운영 포기 의사를 통보했다. 이에 복지부가 새로운 운영주체를 찾게 됐고, 수소문한 끝에 나에게 인수를 타진해 온 것이다.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적자는 불 보듯 뻔하고, 기왕에 인수하려면 섬 주민에게 제대로 된 의료혜택을 줘야 하는데 워낙 오지이다 보니 걱정이 앞섰다.

도서 지역을 무료 진료할 때 접했던 순박한 섬 주민들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결국 95년 2월 인수를 결정하고, 그해 6월 11억4000여만 원을 들여 현대적인 의료장비를 갖추고 다시 문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원격화상 진료시스템을 도입했다. 민간병원으론 국내 최초였다. 마이크로웨이브 중계망을 구축해 백령도길병원에 있는 환자가 모니터를 보며 구월동 의사에게 진찰을 받게 한 것이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원격진료시스템은 그동안 길병원이 쌓아온 노하우에서 비롯됐다. 같은 해 4월 먼저 문을 연 심장센터 개원 기념 국제심혈관심포지엄에서 우리는 수술실과 회의장을 화상시스템으로 연결해 의사교육에 활용했다. 수술 모습을 회의장에 참석한 의사들이 참관하며, 집도의에게 질문을 하고 대화도 하는 시스템이었다.

99년 심장병을 앓고 있던 31세 임신부가 화상시스템의 도움을 받았다. 임신 2주째부터 관리를 받았는데, 37주에 조기 진통이 시작돼 본원 심장내과.산부인과 의료진의 합동 화상진료로 건강한 아이를 순산할 수 있었다.

백령길병원에 근무하던 어느 의사는 내가 직접 받은 '아이'였다. 탄생을 지켜 본 아기가 자라서 의사가 된 뒤 길병원 식구로 들어와 백령도에서 봉사의 길을 걷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백령길병원은 연간 4억~5억 원의 적자에 허덕이다 6년여 만인 2001년 인천시로 운영권을 넘겨야 했다. 백령길병원은 의료취약지 주민과 사랑을 나눈 의미가 컸던 곳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안고 백령도 주민들의 곁을 떠납니다." 병원을 넘기기 직전 나는 1600여 주민들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백령길병원은 지금껏 내 품에서 떠나 보낸 유일한 '가족'이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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