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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청와대 “경기 하방 위험” 인정…책임은 없고 돈만 풀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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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가 공식적으로 ‘하반기 하방 위험’을 거론했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의 브리핑에서다. 그는 현 상황에 대해 “미·중 통상마찰이 확대되며 제조업과 교역이 크게 위축되고 고용여건도 불확실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4월 적자가 됐던 경상수지가 외국인 배당 송금 감소로 곧 흑자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하고, “청년 취업자와 대통령이 강조하는 신산업 수출도 빠르게 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장 활력을 회복하려면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의 신속한 통과가 절실하다”고 했다. 경제지표가 최악으로 나오는 데에 대한 반성 대신 현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공치사만 늘어놓고, 마치 추경이 경기 회복의 ‘해답’인 양 주문한 것이다. 특히 그는 지난 6일 한국은행의 기준연도 변경으로 국가채무비율이 35.9%로 떨어진 것을 거론하며 “여건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 여건이 커졌다”고 했다. 국가채무비율 하락을 재정 확대의 편리한 도구로 쓰겠다는 얘기다.

“수출·성장률 등 대외 불확실성” 강변 #청와대 수석이 정책 자랑만 해서야 #한국형 국가 채무 마지노선 필요

한은의 기준연도 변경으로 국가채무비율을 둘러싼 논란이 흐지부지된 건 사실이다. “국가 채무는 절대로 국내총생산(GDP)의 40%를 넘을 수 없다”던 외침도 기댈 곳을 잃었다. 사실 그간의 국가 채무비율 논쟁은 다분히 소모적이었다. 40%를 깨도 된다는 정부·여당이나 안된다는 야당 모두 뚜렷한 근거는 없었다. 그저 나랏돈을 풀겠다는 쪽과 막겠다는 쪽의 해묵은 정치 논박일 뿐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 경제가 심상치 않다는 점이다. 이럴 땐 정부가 돈을 풀어야 한다는 게 상당수 재정·경제학자들의 견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라 곳간을 마구잡이로 열어젖힐 수는 없다.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이 105%인 미국이나 224%인 일본의 예를 들어 “한국 정부도 돈을 훨씬 적극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하는 일각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한국은 만일의 경우 달러·엔을 찍어 빚을 갚을 수 있는 미국·일본과 처지가 전혀 다르다. 혹자는 과거 유로존 가입 요건이었던 ‘60%’를 거론한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는 것 역시 적절치 않다. 재정을 더 건전하게 유지해야 하는 한국만의 특수성이 있어서다.

우선 사회·지정학적 여건이다. 고령화 속도는 세계에서 제일 빠르고, 아기 울음소리는 사라져 간다. 통일에도 대비해야 한다. 그만큼 재정에 여력을 둬야 한다.

둘째, 공공기관 부채다. 한국은 700조원 대에 이르는 국가 채무 말고도 500조원 넘는 공공기관 빚이 있다. 여차하면 나라가 대신 갚아야 한다. 셋째, 한국에는 1500조원을 넘는 가계부채가 있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83%에 이르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31%)보다 훨씬 많다. 재정이 흔들리면 이런 가계부채 문제가 폭발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국가 채무비중이 GDP의 40%를 훌쩍 넘어도 괜찮다”고 선뜻 말하기 쉽지 않다.

차제에 한국의 특수성을 살펴 우리의 채무 비율 마지노선을 정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재정·경제·금융·인구·복지·통일 등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재정 상황별로 닥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우리 경제와 재정이 견딜 수 있는지 ‘스트레스 테스트’를 해야 한다. 그 결과를 놓고 국민을 설득해 채무비율 마지노선 같은 건전재정 운영 준칙을 세우는 게 시급하다. 곳간의 빗장을 푸는 건 그 다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