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20년전에 싹텄다"|60년대 초 농장관리자로 농대에 편입|실적에 따른 보너스제 도입 고르바초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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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소련 제2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발상지는 어디인가. 모스크바 말고 페레스트로이카의 발상지가 따로 있는가. 만약 이 물음에 정답이 있다면 그 정답은 북부 코카서스의 스타브로폴일 것이다.
스타브로폴은 「고르바초프」가 1931년에 태어난 프리볼노예로부터 l백60㎞ 떨어진 도시로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기반이요 도약대였다. 한국계 「빅토르·알렉산드로비치· 엄(엄)」도 「고르바초프」에 관해서 아는 것이 많고 그와 인연이 깊은 사람중의 하나다.
지금은 타슈켄트의 관개기술 및 농업경제대학의 학장인 엄 박사는 바로 「고르바초프」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엄 박사로부터 들은 제자 「고르바초프」, 학생「고르바초프」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기 전에 「고르바초프」가 출세가도의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엄 박사와 해후하게 되었는가를 먼저 설명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순서일 것 같다.
10대의「고르바초프」는 고향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스타브로폴에서 중등직업전문학교를 다니고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운동에 참가하면서 발군의 능력을 인정받아 공산당 시당부 중앙위원회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대학에 진학하는 행운을 잡았다. 그것은 그가 「노동적기」훈장을 받은 이듬해인 19세 때 (1950년)의 일이다.

<당무와 학업 병행>
「고르바초프」가 55년 모스크바대학 법학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다른 수많은 젊은 엘리트들이 그렇듯이 콤소몰에서 당료 생활을 시작한곳이 바로 스타브로폴이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바로 콤소몰의 스타브로폴 지역위원회 선동선전국 부국장이 되고, 56년 서기로 승진하고 몇년에는 제1서기가 된다. 그로부터 4년 뒤가 되는 62년 31세에 공산당으로 자리를 옮겨 스타브로폴 지역 전체의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의 생산을 관리하는 최고책임자가 된다.
그는 그렇게 해서 훗날 그를 소련 최고의 권좌에 앉히는데 강력한 무기가 되는 농업경영과 인연을 맺게되고, 농업문제에 관한 이론무장을 위해 스타브로폴 농업경제대학에 편입하게 된다. 당무와 학업의 범행이다.
바로 그때 그 대학 경제학부의 부장이 엄 박사였다. 「고르바초프」는 1965년에 편입학 하여 1967년 「농업경제의 전문가」자격을 얻고 학사로 졸업할 때까지 엄 박사의 강의를 두 강좌 들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서로를 잘 알게 된 것은 엄 박사가 학부 장이었기 때문에 그 지역 당의 농업경영을 사실상 총괄하고있던 「고르바초프」와는 강의실 밖에서 농업문제에 관해 많은 토론을 했고, 모스크바대학에서 철학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고르바초프」의 부인 「라이사」가 엄 박사의 경제학부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강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 박사와 「라이사」는 가까운 동료사이였다. 이제 엄 박사의 「고르바초프」평을 들어보자.
『한마디로 그는 사람이 달랐어요. 독창적이고, 대담하고, 앞을 내다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총명하고 부지런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르바초프」는 스스로 결단과 결론을 내리고, 자신이 내린 결정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자세가 분명했습니다.』
엄 박사는 「고르바초프」의 논문지도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그 무렵의 「고르바초프」에게서 20년 후의 페레스트로이카의 전조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에 엄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라이사」와는 동료>
『그가 하는 말은 남다른 데가 있었지만 그에게서 개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농업경영에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가지 실례가 1977년의 참외수확 때 그가 처음으로 채용한 이파토보방식입니다.
그전에는 참외수확을 제때에 하지 못해 밭에서 썩는 게 절반이 넘었어요. 「고르바초프」는 대규모의 기동작업반을 투입하여 처음에는 참외를 거두어들이고 후에는 다른 농산물의 수확에까지 확대했습니다. 요컨대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실험했어요.
좋은 방식이었는데 개인에게 자극을 허용하고 그래서 소득에서 평등의 원칙을 어겨 사회주의이론과 양립할 수 없다는 반대에 부닥치고 좋은 방식이 널리 확산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된지 3년이 더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고르바초프」가 스타브로폴에서 정력적으로 시도한 가장 역사적인 실험은 집단 청부제였습니다. 상부기관의 계획에 따른 관리, 지시, 생산량의 합당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근로자집단이나 가족집단이 국영농장이나 집단농장의 관리부와 직접 계약을 맺고 당을 포함한 생산수단을 임차하여 곡물을 생산하고 가축을 길러 실적에 따라 보너스를 받는 것이 집단 청부제입니다.』
소련에 사는 우리 동포들간에는 「고르바초프」가 고려인들이 개인부업농지에서 부지런히 일해 소득을 많이 올리고 다른 민족들에 비해서 잘사는 것을 보고 페레스트로이카에 착안했다는, 다분히 아전인수격이고 자랑 섞인 해석이 나돌고있다. 이 점에 대해서 엄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글쎄요.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겁니다. 우리 고려사람들이 파·수박·참외 심고 일 잘해서 성공하는 것 「고르바초프」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78년 11월 마침내 공산당중앙위원회 농업담당서기가 되어 「라이사」와 함께 모스크바로 떠났다.
그들이 모스크바로 떠난 뒤에는 1년에 한두 번 고향에 올 때 「라이사」는 예외 없이 학교로 엄 박사를 찾아가 학생들 형편, 그곳 주민들 형편을 묻곤했다.

<85년 마지막 만나>
그런 정도의 만남이 84년까지 계속되다가 85년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에 선출된다. 엄 박사가 「고르바초프」를 마지막 만난 것은 그해 5월로 기억된다.
엄 박사는 자신과 「고르바초프」와의 관계가 과장되게 알려지는 것을 민감하게 경계한다.
『그때 그는 내게 악수를 청하면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는 나를 잘 압니다. 그게 다지요. 나는 그가 잘되기를 바라고 페레스트로이카의 성공을 빕니다. 내가 아주 어려운 처지에 몰리면 혹시 그에게 편지라도 쓸는지 모르지만 아직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엄 박사는 그 연배의 대부분의 우리동포들처럼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에서 1931년에 출생했다. 「스탈린」은 연해주지역에 사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협력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엄 박사가 애용하는 표현으로 그 때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 우리동포들의 생활은 구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집안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51년 10년제 학교를 빼어난 성적으로 졸업하고 볼가유역의 사라토프로 가서 경제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학사·석사·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조교와 강사로 있다가 1965년 스타브로폴 농업경제대학의 교수로 가게된다. 「라이사·고르바초프」는 엄 박사보다 먼저 그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엄 박사는 교수, 경제학부장으로 20년을 근무하다가 1986년 타슈겐트의 관개기술 및 농업경제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했다.
엄 박사는 한국계로는 소련전체에서 유일한 학장이다. 11개 학부에 학생은 대학원생을 합쳐 1만1천1백명이고 베트남·라오스 등 제3세계로부터의 유학생이 6백명, 교수진은 1천명이라고 엄 박사는 설명했다.
운전수 딸린 승용차가 있고 한달 월급이 7백25루블인걸로 미루어 보아도 엄 박사가 소련사회에서 누리는 지위의 높이를 알만하다. 근로자나 사무직원의 평균 월급은 2백루블이다.
한국에 한번 가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엄 박사. 그는 1985년 아내를 잃고 17년 연하의 여성과 재혼을 했다.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시집가서 외손녀 하나가 있고,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어린 딸 하나가 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들어찬 타슈켄트관개기술 및 농업경제대학의 본부건물 안에 있는 학장실은 20평은 더되어 보였고, 책상 위에는 수많은 호출버튼과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어 그 마이크를 통해 엄 학장은 집무실밖에 있는 비서들이나 다른 간부직원들에게 쉴새없이 업무지시를 한다.

<한국계론 첫 학장>
소련 최고권력자의 옛 스승, 퍼스트레이디의 옛 동료, 연방대학의 학장이면 소련사회에서는 어떤 기준으로도 성공한 생애라고 할 수 있지만 연해주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는 특수한 환경, 어린 시절 그나마 출생지에서 문화와 풍토가 전혀 다른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유아체험은 일생을 두고 「빅토르·알렉산드로비치·엄」의 심층심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에게는 「엄송범」이라는 한국이름이 있지만 그를 승범으로 불러주는 사람은 없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별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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