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44년만의 충격…일군 중국어 통역관이 폭로 |중국 제남에 「제2 세균전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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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 산동성의 성도 제남에 주둔했던 일본 북나 파견군 제남 지구 방역 급수반은 중국군 포로 등의 인체에 페스트균 등 각종세균을 주사하고 발병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관찰하면서 왁친 개발실험을 자행해온 인체실험 부대.
제남 지구 방역 급수반은 2차대전 당시 세균실험으로 악명 높았던 제731부대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캠프였다. 이 캠프 속에서 중국군 포로 및 한국 유랑민 등 1천 여 명이 인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비참하게 숨져갔다는 사실이 당시 이 부대에서 중국어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한국인 최형진 씨(68·대구시 신천동 480)에 의해 종전 44년만에 최초로 폭로돼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군의관들은 심지어 페스트균을 프로들에게 주사했습니다. 주사를 맞은 포로들은 오한과 고열로 심한 고통을 겪었고, 이중 10여 명은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최씨는『제남 지구 방역 급수반에서 근무했던 1년 10개월은 악몽 같은 나날들이었다』고 회고한다.
평북 의주 태생인 최씨는 중국 하북성의 청진 시립 초급중학교 2년에 재학 중이던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16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군 통주 수비대 중국어 통역관으로 징발됐다.
그가 이 곳 방역 캠프에 중국어 통역관으로 배속된 것은 1942년 2월.
이 부대는 부대장인「와타나베·가즈오」(도변일부) 중좌를 제외한 세균 연구팀과 배양 팀·인체실험 팀 등 20여명의 군의관들이 한결같이 흰 가운만 착용해 백색 캠프로도 불려지기도 했다.
이중 철망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최씨는 각종 임상과정의 통역 때문에 인체실험 과정에서 행해졌던 비인간적인 만행을 낱낱이 목격할 수 있었다.
최씨가 이곳 백색 캠프에 배속될 당시 수용 중이던 인체실험용 포로는 모두 1백 여 명. 이른바 장개석 군대인 중국 중앙군 소속이 대부분이었고 이 가운데 일제의 수탈정착에 문전옥답을 잃고 중국대륙으로 건너간 한국인 유민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백색 캠프의 주임무는 토벌 부대에 투항해온 포로들을 인수, 수용하면서 각종 전염병원균을 투여, 발병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투병 과정을 관찰하는 등의 임상실험을 거쳐 세균을 배양한 뒤 왁친과 세균포탄을 제조하는 것.
군의관들은 실험용 포로가 부족할 경우 인접한 중국인 부락을 돌며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인간 사냥까지 서슴지 않았다.
최씨가 최초로 목격한 인체실험은 포로 10명에게 천연두 병원균을 주사한 후 반응을 관찰하는 임상실험.
온몸에 두독이 번져 탈진상태에 빠진 포로들이『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은 처절했다. 이 과정에서 3명이 목숨을 잃었고 시신들은 소각장으로 실러가 한 줌 재로 변했다.
장티푸스 왁친을 개발할 때엔 포로들의 급식인 주먹밥에 병원균을 혼합, 급식했다.
심지어 발진티푸스 병원균을 배양하기 위해 프로들의 때 절은 몸에서 들끓고 있는 이(풍) 를 유리병에 수집, 병원균을 검출하고 병원균을 다시 포로들에게 주사했다.
최씨는 이 때문에 포로들은 백색 캠프에 수용되는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병마에 시달리며 죽어갔다고 몸서리쳤다.
군의관들은 중국대륙의 풍토병 왁친 개발을 위해 인근 부락에서 개똥을 수집해 병원균을 검출, 배양한 뒤 주먹밥에 병원균을 혼합, 포로들에게 먹이는 만행도 자행했다.
또 개똥에서 콜레라균이 검출되자 백색 캠프에서 8km쫌 떨어진 일대 마노 주민 50여 가구 3백 여 명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시도했다.
콜레라 병원균이 묻은 돼지고기 등 개 먹이를 마을에 뿌려놓고 철수한지 보름만에 온 마을에 콜레라가 번져 20명이나 숨지는 사태가 빚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이곳 일대 마로를 전염병 발생지구로 선포한 뒤 주민들에게 방역을 실시, 치유과정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같이 인체실험의 희생물이 되어 참혹하게 죽어간 사람은 3개월에 평균 한 차례씩 1백 여 명의 포로들을 보충 받는 것으로 미루어 연간 4백∼5백 명.
최씨는 자신이 이 곳 백색캠프에 배속된 지 1년 10개월 동안 직접 목격한 희생자만도 1천명은 될 것으로 추정했다.
최씨는 백색캠프에서는「와타나베」중좌의 지시로 비밀유지를 위해『통역관도 징발되고 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탈출을 결심, 1943년12월7일 맹장염으로 위장해 야전병원에서 멀쩡한 맹장을 잘라내고 병가를 얻어 이 악마의 소굴을 빠져 나오는데 성공한 것이다.
최씨는『일본 군국주의의 엄청난 죄악을 역사의 뒤 안에 묻어둔다는 것이 죄스러워 뒤늦게나마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말했다. <대구=이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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