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트랙 대치 국면 이후 고소ㆍ고발전이 난무하는 등 국회는 휴업 상태다. 자유한국당은 2일 지도부가 전국 순회 투쟁에 돌입했고, 일부 현역 의원들은 삭발을 감행했다. 이에 국회 사개특위 위원장인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숙제도 안 한 학생이 머리는 왜 깎나”라고 꼬집었다. 여야간 대화의 물꼬가 트일 낌새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이럴 때 여야 중진이 나서야 하는 거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다. 관록과 연륜을 갖춘 다선 의원들이 물밑 대화를 통해 정치의 묘를 살려야 한다는 의미다. 20대 국회 5선 이상 의원은 16명이며, 4선은 33명이다.
실제 과거 중진들은 국회가 교착상태에 빠지면 중재자로 나섰다. 아예 공식 단체를 출범시킨 적도 있다. 2013년 말 새누리당 황우여(5선) 대표를 비롯해 서청원ㆍ정몽준(이상 7선)ㆍ이인제(6선)ㆍ김무성ㆍ이재오ㆍ정의화ㆍ남경필(이상 5선) 의원과 민주당 이해찬(6선)ㆍ문희상ㆍ정세균ㆍ이석현ㆍ이미경(이상 5선) 의원 등이 ‘여야 중진 협의체’를 발족했다.
여당이 “대화가 부족해 정국이 잘 안 풀린다”(정몽준 의원)며 제안했고, 야당도 “극단론자들의 목소리가 과대 포장됐지만 중진들은 극단론자가 없다”(문희상 의원)며 화답했다. 중진 협의체는 정례적 모임을 가지면서 ‘통일헌법’ 등을 논의할 초당적 공식기구 설치에 합의하기도 했다. 다만 이듬해 세월호 참사 등을 겪으면서 협의체는 유명무실해졌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도 여야 중진은 힘을 합쳤다.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3월 10일)을 앞두고 진보-보수 진영 공히 "헌재 판정에 수긍할 수 없다"는 불복 심리가 커지자, 9일 정세균 국회의장과 한국당 심재철ㆍ나경원, 민주당 문희상ㆍ박병석ㆍ이종걸ㆍ원혜영ㆍ박영선, 국민의당 박주선ㆍ조배숙,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 등 다선 의원들이 모여 “모두가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고 또 통합된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고 합의했다.
하지만 이후 여야 중진 모임은 사실상 전무한 상태다. 지난해 문희상 의장이 여야 중진과의 정례 회동인 ‘이금회’를 만들긴 했지만, 식사 자리 이상의 초당적 타협 기구의 의미로썬 기능하진 못했다.
전문가들은 ‘권위의 부재’로 인한 중진 정치 실종이라고 진단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탄핵과 조기 대선을 거치면서 여당은 강력한 청와대 중심 정당이 됐고, 야당은 지리멸렬해졌다. 즉 민주당에선 중진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졌고, 한국당에선 당권 경쟁에만 매달렸다. 이 때문에 여야 공히 중진은 정치개혁을 위한 물갈이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분석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 역시 “국회 최다선인 서청원 무소속 의원(8선)은 힘을 잃은 지 오래됐고, 민주당 최다선인 이해찬 대표(7선)는 제1야당을 향해 ‘도둑놈들’이라고 하고 있다. 한국당 최다선 김무성 의원(6선)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여기에 문희상 국회의장(6선)도 최근 강제 사보임 논란으로 야당의 거센 반발을 받고 있다. 결국 중진 구심점이 없는 셈”이라고 말했다.
2013년 ‘여야 중진 협의체’에 참여했던 한 전직 의원은 “당시만 해도 중진을 어른으로 모시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최근엔 선수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이념대결이 격화돼있다. 괜히 나섰다간 '당권 노리냐, 노욕 부린다'는 말만 들을 게 뻔한데 누가 나서겠나”라고 전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