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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대출로 바꿔준다 해 체크카드 빌려줬는데 500만원 벌금

중앙일보

입력

보이스피싱 범죄 이미지. [연합뉴스]

보이스피싱 범죄 이미지. [연합뉴스]

2년 전 직장이 없었던 A씨(당시 30세·여)는 국내 유명 캐피털사 상담원으로부터 솔깃한 전화를 받았다. “자사의 저금리 대출로 갈아타라”는 대환대출 안내였다. 당시 A씨는 대부업체 4곳으로부터 법정최고이자(27.9%) 수준으로 1200만원을 빚진 상태였다. A씨는 당시 직장이 없었지만 이 상담원은 대출 가능 금액으로 3000만원이나 제시했다고 한다. 물론 금리도 법정최고이자보다 낮았다. A씨는 상담원이 보내준 인터넷주소를 통해 자신의 스마트폰에 캐피털사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A씨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나와 있는 해당 캐피털사 대표번호로 연락했다. 전화를 받은 또 다른 직원은 A씨와 조금 전 통화했던 상담원과 연결해줬다. 그제야 A씨는 대출상담을 이어갔다. 그는 상담원의 요구대로 ‘잘 사용하지 않는’ 본인 명의 은행계좌의 체크카드를 퀵서비스로 보내줬다.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상담원은 “대출한도를 늘리려면 입·출금 명세가 많아야 한다”고 안심시켰다. A씨는 비밀번호도 알려줬다.

보이스피싱 인출책이 은행 현금인출기에서 피해금액을 찾고 있는 모습이 담긴 폐쇄회로TV(CCTV) 영상.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 없습니다. [사진 경찰]

보이스피싱 인출책이 은행 현금인출기에서 피해금액을 찾고 있는 모습이 담긴 폐쇄회로TV(CCTV) 영상.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 없습니다. [사진 경찰]

악성 프로그램이 전화발신 가로채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던 A씨는 다음날 은행을 찾았다. 캐피털 업체로 보낸 체크카드를 분실신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해당 계좌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된 후였다. 가짜 캐피털사의 앱을 깔았던 게 화근이었다. 전날 포털에서 확인한 캐피털사의 대표번호로 건 전화를 보이스피싱 조직이 중간에 가로챌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앱을 지우고 나니 실제 캐피탈사 대표번호로 연결됐다. 상담원도 가짜였다.

스마트폰 앱을 통한 신종 사기 수법이었다. 곧바로 분실신고를 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A씨는 뜻밖에도 전자금융거래법위반 혐의로 입건돼 수사를 받았다. 전자금융거래법상 통장이나 체크카드 등을 빌려주거나 빌려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같은 법에서 이를 어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빌려준 체크카드가 범죄에 이용되지 않아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게 금융감독원의 설명이다.

결국 A씨는 지난해 8월 수원지법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누구든지 전자금융거래 접근 매체(체크카드)를 양도 또는 양수해서는 안 된다”고 선고이유를 밝혔다. 고금리 대출에서 벗어나려는 대환대출 신청이 ‘범죄행위’가 된 것이다. 대가도 없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이스피싱 범죄 근절을 위한 예방 캠페인 모습 [연합뉴스]

보이스피싱 범죄 근절을 위한 예방 캠페인 모습 [연합뉴스]

대환대출 신청에 속아 '피의자' 돼

A씨는 억울하다고 하소연한다. 그는 “빌려준 체크카드가 범죄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며 “중간에 전화를 가로채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교묘한 수법에 속았는데, 평소 들어보지 못한 신종 수법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주위에서 평소에 (가족 등 가까운 사이끼리) 체크카드를 빌려주는 경우를 봐왔었다”며 “빌려준 행위 자체만으로 범죄가 된다는 전자금융거래법이 일반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항소했고, 현재 2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수법은 크게 ‘대출 빙자형’과 ‘기관 사칭형’으로 나뉜다. 여기에 스마트폰 앱을 이용한 수법까지 나타났다. 금감원은 지난 17일 스마트폰 원격조종이 가능한 앱을 설치하도록 한 뒤 예금 등 1억9900만원을 빼돌린 사례를 신종수법으로 소개했다. 보이스피싱은 돈을 잃는 문제 외에도 A씨처럼 형사처분까지 받는 억울한 상황까지 몰릴 수 있어 더욱 주의해야 한다.

금감원, "앱 설치요구는 의심해봐야"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유선전화나 출처를 알 수 없는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앱을 설치하라는 요구는 보이스피싱이 의심되므로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엄밀히 말하면 가족 사이에도 체크카드를 빌려줘서는 안 된다. 계좌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쓰일 경우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도 질 수 있다”고 당부했다.

보이스피싱 피해 지난해 역대 최고

한편 보이스피싱 피해 금액은 지난해 4440억원으로 역대 최고였다. 2016년 1924억원에서 2017년 2431억원으로 늘었고 지난해엔 증가세가 가팔랐다. 낮은 금리로 대출하겠다고 속여 수수료나 대출금을 챙기는 대출 빙자형이 전체 70%를 차지했다.

경찰은 이런 보이스피싱 범죄를 뿌리 뽑으려 전쟁 중이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의 경우 이달 초 2부장(경무관)을 팀장으로 수사·형사·홍보 등 11개 부서가 참여하는 ‘전화금융사기 대응 TF팀’을 구성해 대대적인 단속 등에 나섰다. 강원지방경찰청은 지린성(吉林省) 공안청과 범죄정보 교환, 양국 연합단속 등 보이스피싱 공동대응 방안에 합의했다.

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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