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요" 호소하며 마약성 진통제 '모아모아', 12억원어치 팔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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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가 마약성진통제 판매를 위해 인터넷에 올린 사진들. [노원경찰서 제공]

A씨가 마약성진통제 판매를 위해 인터넷에 올린 사진들. [노원경찰서 제공]

“허리도 아프고 온몸이 다 아파요.”
2018년 8월, 미국인 A씨(40)는 통증을 호소하며 서울 시내 한 의원을 찾았다. A씨는 몇 년 동안 ‘예전에 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뒤 온몸이 아프다’며 마약성 진통제를 한달치 타가던 환자였고, 이날도 한달분의 진통제를 받아 병원을 떠났다.

그러나 알고보니 A씨는 바로 전 주에도 다른 의원에서 한달치 약을 받아갔고, 같은 수법으로 의원 5군데 이상을 돌며 거의 매 주 한달치의 약을 타갔다. A씨는 이렇게 모은 약을 본인이 다량 복용하기도 하고, 남는 약은 해외로 몰래 팔았다. A씨가 5년간 해외로 밀수출한 마약류는 12억원어치에 달한다.

서울 노원경찰서는 마약류관리법 위반으로 미국인 A씨를 구속하고,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고 24일 밝혔다. 부인 B씨도 공범으로 불구속 송치됐다.

"아프다" 호소, 제일 센 마약성진통제 모아

A씨는 2008년부터 한국을 드나들다가 2013년 원어민강사 비자(E2)로 한국에 들어왔다. A씨는 잠시 영어강사 생활을 했지만 한국말이 서툴러 그마저도 금방 그만뒀다. 생계가 막막해진 A씨는 2013년 12월부터 자신이 처방받은 마약성 진통제를 해외로 팔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 광고해 미국, 호주, 가봉 등 32개국에 약을 보냈다. A씨는 저가 컴퓨터 마우스 등을 보내는 척하면서 마우스 안에 약을 숨기거나, 서류를 보내는 것처럼 꾸며 서류 사이에 마약류 패치를 끼워 보냈다.

A씨는 마우스 속에 마약을 숨기거나, 서류 사이에 패치를 숨겨 해외택배로 보냈다. [노원경찰서 제공]

A씨는 마우스 속에 마약을 숨기거나, 서류 사이에 패치를 숨겨 해외택배로 보냈다. [노원경찰서 제공]

경찰은 올해 2월 미국 세관에서 ‘의료용 마약류가 숨겨진 수출품을 압수했다’는 첩보를 넘겨받아 수사에 착수했다. 반송된 압수품 속에는 펜타닐패치 72매, 옥시코돈 45알이 들어있었다. 펜타닐패치와 옥시코돈은 가장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로 암으로 통증이 심한 말기환자나 만성 통증환자에만 처방된다. 경찰 관계자는 “A씨는 한 번에 옥시코돈 100알, 펜타닐 패치 5장 정도를 한꺼번에 팔았다”며 “12억원도 가장 적게 추산한 액수고, 실제 범행 금액은 더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외국인·비보험, 마약류 중복처방 못 걸러

경찰은 "A씨가 한국말은 "아프다" 정도밖에 못 하고, 통증을 계속 호소해 의사는 그 말을 믿고 약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A씨는 미국인인데다 비보험으로 약을 처방받아 복지부에서 관리하는 DUR(의약품 안전사용서비스)에도 처방 내역이 기록되지 않았다. A씨에게 약을 처방해준 의원들은 A씨가 다른 곳에서도 약을 받는지 알 방법이 없었고, A씨는 이런 허점을 이용해 한 달에 거의 4~5달치 약을 받아왔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더 많은 약을 처방받기 위해 ”부인 약도 달라“며 부인인 B씨의 이름으로 처방을 받기도 했다.

경찰은 지난 11일 A씨를 구속하고 19일 검찰에 넘겼다. 경찰은 “식약처에 허위‧과다 처방 여부 확인을 부탁한 상태”라며 지금까지 확인한 의원들 외 A씨가 약을 처방받은 의원이 더 있는지도 확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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