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스트레스·과로로 뇌출혈 얻은 마트 직원, 업무 관련성 적더라도 산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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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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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 때문에 병을 얻었거나 병이 악화했다면, 병과 업무 관련성이 적더라도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은 4일 한 대형마트 직원 허모(36·남)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 불승인처분 취소 소송에서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이 위법하다며 허씨의 손을 들어줬다.

허씨는 지난 2014년 11월 A마트 체인점에 입사해 물류·행사팀장으로 일했다. 허씨가 맡은 업무는 행사 기획, 창고 물류관리 및 민원처리 등이었다. 그런데 2015년 11월 어느 날, 허씨가 출근하지 않았다. 동료가 허씨의 집을 찾았을 때 허씨는 집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고, 이후 뇌출혈 진단을 받았다. 허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허씨의 기대와 달리 2018년 4월 근로복지공단은 "허씨의 일과 뇌출혈 사이 상당한 인과 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며 요양급여 신청을 승인하지 않았다. 허씨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주6일 근무·53시간 넘는 주당 근무시간… "과로"

법원은 허씨의 근로시간부터 따졌다. 허씨는 주 6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했다. 일주일에 1번은 오후 2시부터 11시까지 야간 당번 업무도 맡았다. A마트에는 일일 출퇴근 기록부가 있었는데, 실제 시간외 근무시간과 상관없이 미리 근무시간이 적혀있는 기록부였다. 이 출퇴근 기록부에는 허씨가 사고 전 1주일간은 53시간6분을, 직전 4주간은 평균 주당 51시간19분을, 직전 12주 동안은 주당 평균 52시간35분 일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법원은 "시간 외 근무가 모두 반영되지 않은 기록부인데도 주당 근무시간이 52시간을 초과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또 마트에는 문을 열고 닫는 당번이 있었다. 개점은 오전 7시 30분에서 오전 8시 사이, 폐점은 오후 11시부터 11시 30분사이 이뤄졌다. 허씨는 2015년 8월 1일부터 쓰러지기 전날인 2015년 11월 18일까지 약 2개월 반 동안 문을 여닫는 당번을 주 2회 이상, 모두 49차례나 맡았다. 법원은 "이런 점에 비춰 보면 업무량이 상당히 과중했다"고 판단했다.

30대 남성, 뇌출혈 드물어…업무 인과성 인정

키 175㎝에 몸무게 85㎏. 발병 당시 만 32세였던 허씨는 흡연자도 아니었다. 다만 허씨는 고혈압으로 진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허씨 주치의와 근로복지공단 자문의는 허씨의 뇌출혈이 스트레스 때문인지 고혈압 때문인지를 두고 다퉜다.

법원 진료기록감정의는 "과로나 스트레스가 뇌출혈을 직접 유발하진 않지만, 고혈압의 원인이 된다"며 "결과적으로 스트레스가 뇌출혈의 보조적인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감정의는 "허씨의 뇌출혈 발병에 과로와 스트레스는 40% 정도 기여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또 "30대 초반인 허씨의 나이를 고려하면 다른 요인 없이 고혈압 때문에 뇌출혈 진단을 받는 것이 보편적이지는 않다"고 밝혔다.

법원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5조 제1호와 제37조에 따라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 '업무상 질병'은 업무와 질병 사이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면서도, 이 인과 관계가 반드시 의학적·자연 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될 것은 아니라고 봤다.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의 발생 원인에 더해져 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켰다면, 업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이 허씨에게 내린 요양급여 불승인 처분을 취소하라고 명령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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