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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마크]되살아난 꺼진 불 한선교 "이기는 후보 내는데 집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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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진 불도 다시 보자.

최근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바로 한선교(60) 사무총장을 두고서다. 4선의 한 총장은 원조 친박이었으나 박근혜 정부에선 정작 힘을 못 쓴 ‘멀박’(멀어진 친박)이었다. 2년 전 원내대표 경선엔 중립 후보로 호기롭게 나섰지만, 비박 김성태(55표), 친박 홍문종(35표)에 뒤진 꼴등(17표)에 그쳤다. 그렇게 정치인 한선교는 무대 뒤로 잊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황교안 체제 출범과 함께 그가 실세로 부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황 대표가 지목한 첫 번째 당직자로 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사무총장은 재정ㆍ회계 등 당 살림을 책임지지만, 동시에 공천작업의 실무를 총괄해 ‘칼잡이’로도 불린다. 자연히 ‘친황’이란 타이틀과 함께 그의 칼끝이 어디로 향할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한 총장이 ‘도꾸다이’ 기질이 강해 누구를 날릴지 예측불허”라는 말까지 나온다.

한 총장은 원래 국회에서 손꼽히는 두주불사(斗酒不辭)였으나 요즘은 술도 끊었다. 그 좋아하던 술도 끊고 금욕적(?) 생활을 하는 한 총장을 11일 밀착마크했다.

11일 중앙일보는 한선교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을 밀착마크했다. 사진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정수경

11일 중앙일보는 한선교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을 밀착마크했다. 사진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정수경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이 당내에 돈다.
“1970년대 그런 개그가 있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고 해서, 불 끄고 나가려다 다시 와서 살피고, 완전히 껐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자’고 하니 또 들춰보고, 가다가 또 돌아서고…일종의 허무 개그였고 덕분에 많이 웃었다. 내가 그런 웃음을 줄 수 있을까. 하여튼 나에게 작은 불씨가 남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이 당을 되살리는 데 일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황교안 대표와 성균관대 2년 선후배 사이다. 선배 덕에 사무총장이 된 건가.
“전혀. 학창시절엔 전공(한 총장은 물리학, 황 대표는 법학)이 다르니 일면식도 없었다. 15년 전쯤 초선 시절 ‘검사 황교안’을 행사에서 한번 본 게 전부다. 그때도 ‘이런 검사가 있구나, 아주 해맑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 황 대표가 법무부장관ㆍ국무총리 할 때 얼마나 반듯했나. 거기에 완전히 반했다. 일종의 짝사랑이랄까. 그 짝사랑하는 이가 나에게 손수‘사무총장 맡아달라’고 하는데 두말할 게 있겠나.”
2004년 당시 박근혜 대표가 한선교 대변인(왼쪽)과 진영 대표 비서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중앙포토]

2004년 당시 박근혜 대표가 한선교 대변인(왼쪽)과 진영 대표 비서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중앙포토]

한 총장은 이른바 ‘친박 학살’이라 불리던 2008년 총선 경선에서 떨어졌다. 그때 트라우마로 사무총장을 무척 하고 싶어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글쎄, ‘만약 사무총장을 하게 되면 난 공정하고 공평하게 할 자신이 있는데’라는 마음이 있긴 했다. 알려져 있듯 나는 원조 친박이었다. 박근혜 대표의 초대 대변인이라는 것을 지금도 가장 자랑스러운 당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원박’임에도 강성 친박을 거부했다. 그럼 비박? 그것도 아니다. 난 복당파가 돌아올 때 공개적으로 반대 성명을 냈다. 그게 나다. 성향상 어디 계파에 들어가고, 조직 논리에 무조건 따르질 못한다. 반골 기질이 다분하다. 황 대표한테 왜 나를 사무총장으로 점찍었느냐고 물었더니 이러더라. ‘중립이시잖아요.’  2년 전 원내대표 경선에도 중립 후보로 나오지 않았나. 그때도 솔직히 중립으로 나오고 싶어 나온 게 아니라 친박도, 비박도 안 밀어주니 중립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치란 결국 세를 불려가는 싸움 아닌가.
“1990년대 ‘서울의 달’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그 주제곡 가사가 이렇다. ‘처음으로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정치하면서 늘 그런 마음이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거 같아 내면의 불화가 있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친박’으로 활동한 게 나의 (계파 정치의) 전부다. 15년 의정활동 하면서 내가 가장 뿌듯해하는 게 뭔지 아나.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광고 없앤 거다. 옥외광고물법에 여성비하, 인종차별 요소 넣지 못하게 법 바꾸었다. 남들은 보면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겐 그런 ‘생활 정치’가 훨씬 중요하다. 어디 끼어서 큰 정치인 되겠다는 생각,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
생활 정치? 솔직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감이 안 온다.  
“내가 4선 하는 동안 우리 지역구(경기 용인병) 초등학교 중학교에 전부 체육관을 지었다. 동마다 공공도서관도 지었다. 주민 일상에 변화를 주는 게 진정한 정치 아닌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거창한 정치개혁인양 떠들지만, 솔직히 특정 정파의 숫자 늘리기에 불과하다. 내 자랑 같아 쑥스럽지만 난 사무총장이 되기 전까지 12년 동안 우리 동네에서 녹색 어머니회 활동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왔다.”
한선교 의원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녹색 어머니회 활동을 하고 있다. [한선교 의원실]

한선교 의원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녹색 어머니회 활동을 하고 있다. [한선교 의원실]

학생들 아침 등교할 때 건널목에서 안전활동하는 녹색 어머니회 말인가? 진짜 12년이나 했나.  
“2007년 8월 말에 그 유명한 이명박-박근혜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이 있지 않았나. 박근혜 후보가 떨어지고 나니 나는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고 할 일도 없더라. 아침에 우리 동네를 돌다 보니 솔개 초등학교 앞에 빈 건널목이 보였다. 위험했다. 그래서 학교 찾아가 ‘녹색 어머니회’ 하겠다고 했다. 솔직히 소일거리 삼아 한 거다. 아나운서 출신으로 얼굴이 좀 알려진 편이라 한번 시작하니 빼먹기도 힘들더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운동 겸 빠지지 않고 했다. 얼마 전엔 건널목에 있었더니 예쁘장한 젊은 여성이 와서 꿈뻑 인사를 하는 거 아닌가. 우두커니 있었더니 ‘저 모르시겠어요’라며 이름을 얘기했다. 예전에 그 초등학교에 다니던 꼬마 숙녀가 훌쩍 커서 그 학교 교생 선생으로 실습을 나온 거다. 그런 추억이 많이 쌓였다.”

한 총장은 ‘주당’으로 유명하다. 아나운서 시절 폭탄주 60잔을 30분 만에 들이부은 일화도 있다. 그런 애주가인 그가 2년 전 술을 끊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집에서 식사하며 반주 삼아 폭탄주를 마시고 있었죠. 근데 큰딸이 지나가는 말처럼‘아빠한테 맨날 똑같은 냄새 나는 거 알아’ 하는 거예요.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고 묘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제 정말 술을 끊을 때가 됐다 싶었죠. 또 ‘술꾼’ 이미지로만 노년을 보내는 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오른쪽)와 한선교 사무총장.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오른쪽)와 한선교 사무총장. 연합뉴스

황교안 대표가 취임한 지 40여일 지났다. 어떤 사람인가.
“우선 일벌레다. 토요일이건 일요일이건, 밤 11시건 전화가 온다. 대학 후배인 나한테 절대 말을 안 놓는다. 절제ㆍ겸양 뭐 이런 게 몸에 배어 있는 거 같다. 밥도 싼 데서만 먹으려고 한다. 또 통상의 정치인이라면 일단 지르고 뒷수습은 조금 소홀한 게 흔하지 않았나. 그런데 황 대표는 준비 단계부터 실제 시행, 그리고 마무리까지 얼렁뚱땅 넘기질 않는다. 그래서 나도, 사무처도 솔직히 힘들긴 하다. 근데 당이란 조직이 조금은 타성에 젖어 짜임새 없이 일하지 않았나. 황 대표 취임과 함께 한국당이 시스템화될 기회가 생겼다고 본다.”
내년 총선 공천에서 칼은 어떻게 휘두를 것인가.  
“나는 칼이 없다. 칼은 공천심사위원들이 갖는다. 나는 세밀한 자료를 준비할 뿐이다. 다만 방향성을 갖고 있다. 한국당 내년 총선 지상 목표는 과반 확보다. 그러려면 누구의 사람을 꽂는다든지, 어떤 그룹은 배제한다든지 하면 안 된다. 그건 황 대표에게도 누차 건의했다.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내야 한다는, 단순하고 명료한 사실에 집중할 것이다.”
전임 김용태 사무총장도 지난번 인적 쇄신 과정에서 스스로 당협위원장을 내놓는 ‘셀프 물갈이’를 택했다. 한 총장은 어떤가.
“불출마 선언을 한다든가, 나를 낙천시키는 것을 떠나 사무총장이라면 공천 및 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도리다. 실무자로서 책임질 일이 있다면, 총선 직전이든 공천을 마무리하면서든 책임을 질 것이다.”

한 총장은 인기 아나운서였다. 1984년 MBC에 입사했고, 95년에 당시로선 드문 ‘프리 선언’을 한 이후 SBS에서 ‘한선교의 좋은 아침’을 9년간 진행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건 2004년이다.

아나운서 시절 한선교. [중앙포토]

아나운서 시절 한선교. [중앙포토]

방송인으로 잘 나갔는데, 왜 정치인이 됐나.
“초등학교 같은 반에 YS(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이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현철이 아버지가 원내총무가 됐다’면서 박수를 치더라. 그게 어린 마음에 무척 부러웠다. 그때부터 국회의원 되는 게 꿈이었다. 중학교 시절엔 현역 의원 3분의 2 이름을 알 정도였다. 또 아나운서 20여년 하고 나니, 뭐랄까 나의 자율성의 한계랄까, 작가나 PD에게 좌우되는 것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도 ‘배지’ 달면 법안도 내고 자기주장도 좀 하면서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박지만씨와 ‘절친’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에 만났나.
“사무총장이 이래서 나쁘다. 너무 바빠 인간관계가 다 끊기게 됐다. 지만이하고는 본 지 좀 됐다. 동창은 아니고, 동갑내기 사회 친구다. 누구는 지만이 때문에 박 전 대통령에게 미움받았다는 소리도 하던데, 그랬다면 내가 4선을 할 수 있겠나. 지만이랑 같이 본 또 한명이 이제는 고인이 된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이다. 정말로 반듯한 친구였다. 그 친구의 죽음이 조금이라도 헛되지 않도록 수사과정에서 피의자 인권침해를 막는 법안을 발의하려고 한다.”
아나운서 21년, 정치인 15년을 했다. 또 무엇을 하고 싶나.
“‘배지’를 한 번 더 달아 20년 채울지, 아니면 16년에서 그만둘지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인생 3막’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궁리는 한다. 술을 끊은 것도 노년기를 위해서다. 무엇보다 가족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아내나 두 딸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시달려 누구랑 시비는커녕, 흥정도 못 한다. 나도 조그마한 가게를 해서 돈벌이를 해야지, 손 놓고 있고 싶지는 않다. 아, 혹시 나중에 한국당이 잘 되더라도 공기업 임원이나 감사 같은 자리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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