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카셋」만들어 반체제 앞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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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80년대 후반의 소련을 상징하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뿌리의 한쪽엔「20차 당 대회 세대」로 불리는 지식인·예술인들이 있다. 젊은 시절「흐루시초프」에 의해 스탈린주의가 공식 비판받았던 공산당 20차 대회(56년)를 예민한 문학·사회적 감수성으로 포착한 이들은 「브레즈네프」의 오랜 정체기동안 예술과 인권운동을 통해 스탈린주의의 부활을 경고하고 해빙의 흐름을 이어 갔다.
그 세대중 한사람인 한국계「율리·김」. 저항시인 겸 민중가수인 그는 소련의 저항문화사에 독특한 존재로 우뚝 서 있다.
그의 저항예술 형태는 시를 쓰고 그것을 직접 기타로 노래하는 것이다. 소련에선「비소스키」「오크자바」「갈리치」등 소위 음유시인들과 동렬의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60년대 강요된 침묵을 거부한「율리·김」은 강제수용소·검열·비밀경찰·개인숭배 등 정치·사회적으로 억압된 현실을 시로 풍자하고 그것을 소박하고도 경쾌한 리듬으로 옮겨 전달했다. 반체제 예술운동에서 소위「녹음 카셋 혁명」을 주도했던 그는 67년 소련 내 인권침해를 비판하는 항의문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교사직도 그만두어야 했다. 무대에도 설 수 없어 한때 김씨 성을 바꿔「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써야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녹음카셋 운동은 소련 반체제 운동사에서「지하출판」에 이어 새롭게 진전된 형태로 「브레즈네프」시대에 풍미했다.
프랑스와 서독에 특히 많이 알려진「율리」는 요즘에도 한 달에 두 번 정도 무대에 서고 TV에 출연하고 있다.
지난달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모스크바 방문중 재소고려인 모임에 초청 받기도 했던「율리」를 그의 아파트 (아프트자보드스카야 5번지) 에서 만나보았다.
일반정부 시인겸 가수로 평가받고 있는데.
『반체제, 반정부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나는 자유정신을 시로 옮겼다.
-사회참여의 시를 언제부터 썼나.
『중학시절 나의 시는 자연·친구·사랑이 대상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사회문제로 관심이 옮겨갔다. 자유정신의 흐름을 유지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시를 노래에 담았다. 사회풍자와 반 전쟁도 소재로 삼았다.』
한국계 아버지(김철산)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율리」의 부모세대에는「스탈린」철권정치의 악몽이 짙게 깔려 있었다.
-부모가 모두 스탈린 시대에 집단수용소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극동의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나 결혼했다. 아버지는 외국노동자 출판소의 한국어 번역원, 어머니는 중학교 선생이었다. 33년부터 모스크바에서 생활을 했으나 아버지는 37년 뚜렷한 이유 없이 수용소로 끌려가고 44년 거기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도 수용소 생활을 했으며 45년에 풀려 나왔다.』
「율리」는 이모의 품에서 자라 국민학교를 다녔고 수용소에서 나온 어머니는 모스크바 거주 자격이 박탈돼 중학교시절을 투르크메니아 (중앙아시아) 에서 보낸다.
『20세가 돼서야 모스크바로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법원에 부모의 명예회복을 소원, 이를 성사시켰다.』
모스크바 사범대 재학시절「흐루시초프」의「스탈린」비판을 지켜보았던「율리」는 스탈린 잔재에 항거하는 흐름에 본격 참여하게 된다.
『대학졸업 후 (59년) 교사들은 의무적으로 지방생활을 해야하므로 3년간 캄차카 반도지역 콜호즈의 한 학교에서 지냈다. 거기서 당시·반 전쟁시·정치풍자시를 썼고 노래를 불렀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노래와 시를 카셋에 복사해 널리 보급하는 녹음카셋 운동을 전개했다.
-자신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준 것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기본적으로 러시아 고유의 예술정신이다. 그리고 서독, 특히 프랑스의「에디트·피아프」「이브·몽탕」의 샹송에도 흥미를 가졌다. 63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미국의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스토리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예술세계는 시인·작곡가·가수를 넘어 영화시나리오·희곡까지로 확대돼가고「정치적 우화」의 새로운 형태라는 격찬을 받기도 했다.
-다양한 작품세계를 갖고 있는데 어디에 애착이 있는가.
『나는 시인이다. 그 동안 3백여 편의 시를 쓰고 일부를 노래로 불렀다. 영화음악도 있었다. 또 10여 개의 시나리오와 희곡이 있다.』
「율리」의 작품집은 아직 제대로 출판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68년 반체제 예술인으로 지목돼 공식활동이 금지된 후유중 때문. 그는 76년부터 해금됐으나 본격 활동을 재개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였다. 85년엔 그의 노래를 담은 레코드가 멜로지아(소련 국영음반) 에서 제작됐으며 매진된 상태.
-한국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
『내가 아주 어렸을때 아버지가 수용소로 끌려가 버려 내가 러시아 가정에서 자라 한국에 대한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한국말은 못 하지만 모스크바에 한국 운동선수들이 왔다는 얘기를 들었을때 크게 흥미를 느꼈다.』
「율리」와 얘기하면서 12평 짜리 그의 아파트 방 한쪽에 붙어있는 소련 군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소련국민전쟁 (볼셰비키 혁명이후 국내 전쟁) 의 영웅으로 칭송 받는「야치르」장군이라고 했다.「야치르」장군의 손녀가 바로「율리」의 부인.
『「야치르」장군도「스탈린」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의 부인과 아들도 수용소에 끌려갔었다.「스탈린」시대 때 나의 부모세대 경험이 창작에 영향을 미쳤다.』
「율리」는 지난 3, 5월 두 차례 프랑스의 소련친선 협회초청으로 파리에 다녀오기도 했다.
-서울에 가고 싶지 않은가.
『꼭 가고 싶다.』
재소한인 중 소련예술계와 일반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그가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고 하자「율리」는 자신의 레코드와 카셋 테이프를 주면서 친구들과 함께 들어보라고 했다.【모스크바=박보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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