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면 “땡그랑” 소리가 나는 종소리처럼 대화의 포문을 “나 때는 말이야”로 여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두 번의 경제위기와 여덟 번의 올림픽이 지나고, 300원이면 사먹던 아이스크림은 1000원이 되고, 버스카드가 생겨나 휴대폰으로 들어가고, 플로피 디스크가 멸종하고, ‘삼김’ 하면 DJ·YS·JP가 아니라 삼각김밥을 떠올리는 이들이 경제활동인구가 된 걸 보고 있노라면 예전이란 걸 기억 속에라도 붙잡아 보고 싶어진다.
그럴 때면 “나 때는 말이야” 대신 저녁 뉴스를 켜 본다. 그곳엔 도통 변하지 않아 세월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있다. 남성의 몫으로 생겨난 뉴스 앵커란 자리에 여성도 앉게 된 건 1980년대 말의 일이었는데 당시 저녁 뉴스 남녀 앵커의 나이 차는 18살, 25살이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나이가 적은 쪽과 많은 쪽의 성별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단 건데, 여전히 그렇단 게 또 문제다. 여성 앵커는 10명 중 8명이 30대 이하, 남성 앵커는 10명 중 9명이 40대 이상이란 인권위 자료가 아니라도 매일 저녁 TV만 켜면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사정을 잘 모르는 어느 외국인이 이를 보고 “한국은 남성 평균 수명이 여성보다 10년은 거뜬히 많은 나라군요?”라고 물어오면 뭐라 해야 할까. “한국은 남성이 여성보다 입사 자체가 늦어서예요!” 할까? 하지만 한 취업포털에서 신입사원 평균연령은 남성 29.2세, 여성 27.9세로 1.3살 차이뿐이라고 조사해 놨다. ‘경단녀(경력단절 여성)’ 현상을 반영한 사회 풍자라고 할까? 그렇다고 50대 이상의 여성이 덜 주목받는 시간대의 앵커로 등장하는 것도 아닌데 이것도 안 되겠다.
우리 사회가 ‘일하는 남성’과 ‘일하는 여성’에게서 보고 싶은 게 각각 ‘경험과 노련함’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니라면 이제 달라질 때도 됐다. 그게 맞는다고 해도 됐다. 앵커(anchor)는 말 그대로 기준점을 찍어 닻을 내리는 자리기에 이 정도 변화는 앞장서도 되지 않나. “나 때는 말이야, 흰머리 난 여자는 앵커를 못했단 말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면 나이 먹는 게 즐겁겠다.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