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컵라면ㆍ건빵 먹으며 심야 재판…검사와 내내 설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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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 현직 법관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현직 판사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임 전 차장은 “오랜 인연이 있는데 이런 자리에서 보게 돼 마음이 아프다”며 법관 후배를 법정에서 마주한 심경을 밝혔다.

현직 판사 증인 출석 #임종헌 "상급자로서 책임느껴"

컵라면·건빵 먹으며 심야 재판…증인신문 12시간 넘겨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부장 윤종섭) 심리로 2일 열린 정다주 부장판사에 대한 증인신문은 오전 10시 30분쯤 시작해 휴정시간까지 포함해 12시간 넘게 이뤄졌다. 증인신문이 길어지면서 임 전 차장 등은 컵라면과 건빵으로 저녁을 먹고 오후 11시 넘어까지 재판을 이어나갔다.

재판부가 오후 7시쯤 “피고인과 교도관이 식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냐?”고 묻고 담당 교도관이 “식사시간을 놓쳤다. 건빵과 컵라면이 대응식으로 제공된다”고 답하면서 30분여의 짧은 저녁 시간이 주어졌다.

법정서 만난 선·후배, 임 "상급자로서 책임감 느껴"

이날 증인으로 나온 정 부장판사는 피고인석에 앉은 임 전 차장 쪽을 보지 않고 증언했다. 임 전 차장 역시 정 부장판사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의 지시에 따라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사건 검토 문건,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 사건에 대한 보고서 등을 작성한 의혹을 받는다.

그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임 전 차장은 정 부장판사의 직속상관이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고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고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임 전 차장은 정 부장판사에 대한 반대신문을 직접 하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반대신문은 피고측 변호인이 전담한다. 임 전 차장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 놓인 데 대해 상급자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소회를 말씀드렸다”며 반대신문에 들어갔다. 그는 “문건에 사용된 법원 동향파악이라는 용어가 기조 심의관의 업무 범위에 포함된 것이 아니냐” 등의 질문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지는 거 같아서 그만하겠다”며 신문을 마쳤다.

정다주 "임 전 차장 지시로 문건 작성" 

정 부장판사는 반대신문에 앞서 진행된 검찰의 증인신문에서는 임 전 차장으로부터 사건 처리 방향을 검토하도록 지시받았다고 증언했다. 검찰이 "조사를 받을 때 '사법부 권한을 남용하는 부분이 많이 포함됐고, 비밀스럽게 작성해 부담을 느꼈다'고 진술한 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그렇게 진술한 적 있다"고 답했다. 다만 “당시 전반적 업무 주제의 엄중함, 생소함 등 때문에 부담감을 말한 것"이라며 "대외적으로 비밀이 공표되면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2014년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처분 사건과 관련한 내용을 검토한 문건도 임 전 차장의 지시로 작성했다고 인정했다. 정 부장판사는 검찰의 “재항고 사건을 인용하는 방향으로 검토하라고 임 전 차장이 지시한 것이냐”는 물음에 "결국 그런 지시를 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임 전 차장 측 변호인은 "단순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법원의 대응방안을 검토하는 것이지 재판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로 작성한 것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검 "절차 무시하고 이의제기" VS 임 "유도신문 안돼" 

임 전 차장은 검사측의 증인신문 방식과 내용 등을 두고 수시로 이의를 제기했다. 검찰과 여러 차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검사가 정 부장판사에게 “이런 보고서들은 내용이 민감해 다른 심의관들과 공유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는데 맞냐”고 묻자 임 전 차장은 “검찰 조사에서 말한 내용은 증인이 알지 못하므로 유도신문에 해당해 형사소송법에 따라 금지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는 “가만히 들으려고 했는데 검사가 전제를 두고 신문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되기 전인 지난해 10월 15일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며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되기 전인 지난해 10월 15일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며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임 전 차장의 이의제기가 계속되자 검찰은 “소송 지휘는 재판장이 하는 건데 피고인측에서 계속 뭘 하지 말라고 하면 이게 과연 누구의 소송인지 혼란스럽다”고 밝혔다. 또 “증인신문 중에 계속 이의제기하는 건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심각한 문제다”며 “검사 신문에 대해 하나씩 가르치려고 지적하고 있다”고 재판부에 제지를 요청했다.

한편 이날 재판부는 검찰이 임 전 차장 사무실에서 확보한 이동식저장장치(USB)를 증거로 채택했다. 앞서 임 전 차장측은 검찰의 압수수색이 위법했기 때문에 USB를 증거로 쓸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문건 8600여건이 담긴 이 USB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한 핵심 증거 중 하나로 꼽힌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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