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조연의 힘 그들이 없으면 주연도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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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일주일 뒤면 독일 월드컵 우승국이 가려지고, 득점왕도 나온다. 우승국과 득점왕에겐 팬들의 갈채가 쏟아질 것이다. 우승국을 가리기 위해 그동안 200여 개 나라가 지역 예선을 거치며 조연 역할을 했다. 또 득점왕이 탄생하기까지는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수비한 선수 등 조연들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월드컵을 계기로 조연의 가치를 공부한다.

◆ 조연의 발견=월드컵 본선 경기에서 뛰는 선수는 11명이다. 그러나 12명의 후보가 조연으로 뒤를 받친다. 후보가 없다면 주연 선수들은 체력이 바닥나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야구에서 투수의 노히트노런(투수가 9회까지 한 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고, 1점도 내주지 않으며 완투함) 대기록 뒤에는 조연인 포수가 숨어 있다. 사인을 잘못내 안타를 맞으면 공든 탑이 무너지므로 포수의 노력과 마음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포수에겐 경기 내내 스트레스만 있고 영광은 없다. 어느 집단에서나 비중이 크고 화려한 주연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에게 주연은 언제나 갈구의 대상이다. 대중도 주연에만 눈을 돌리기 쉽다.

그러나 최근에는 영화나 드라마의 조연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개성있는 역할을 연출하는 조연들은 관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이들 조연은 주연 못지않은 인기를 끈다. 영화 '신라의 달밤'(감독 김상진.2001년 개봉), '공공의 적'(감독 강우석.2002년 개봉) 등에 나온 성지루나 2004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조연상을 탄 이문식 등이 대표적인 예다. 두 배우는 올해 영화에서 주연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판소리에서도 소리꾼보다 추임새로 맛을 살리는 고수의 역할은 가볍지 않다.

◆ 조연의 가치="한 사람의 인간 형성에는 이름 없는 조연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조연자는 주연자의 삶을 통해 거듭 꽃피어난다." 법정(1932~) 스님이 그의 수필집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샘터사)에서 한 말이다. 조연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실질적으로 조연이며, 조연이 없으면 주연도 있을 수 없다. 주연이나 조연 모두 사회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역사는 주연처럼 도드라진 곳에서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밑바탕에서 든든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조연의 힘으로 만들어져 왔다. 조연은 단순히 주연으로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다. 그 자체로 독자적인 역할이 있고 책임을 지는 자리다. 게다가 획일적이기 쉬운 주연의 모습에 비해 조연의 역할은 사회에 다양성을 부여하며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

◆ 조연이 더욱 빛나려면=오랫동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만년 조연'이라고 한다. 이 말은 조연 생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주연이 아닌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담긴 표현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조연의 역할이 중요하며, 조연 자리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윤리적으로 더 좋은 것처럼 배운다. 그러나 정작 사회에서는 주연에게 주목하고 더 큰 가치를 둔다. 우리 사회에서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 배우로 햄릿 역을 맡지 못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처럼 주연이 박수를 독점하는 문화에서는 진정한 조연의 가치가 인정되기 어렵다. 사회가 발전하려면 '주연은 일류, 조연은 삼류'라는 등식을 하루 빨리 깨야 한다. 즉 주연은 주연대로, 조연은 조연대로 가치가 존중돼야 경쟁에서 뒤진 사람들의 에너지가 동력화된다. 굳이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며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해진다. 기찻길에서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해주고 이름도 알리지 않은 채 사라진 역무원, 어려운 사람들을 매달 도와주는 얼굴 없는 독지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드러나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며 만족한 삶을 산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는 데는 주연인 셈이다.

이태종 NIE 전문기자, 조종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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