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우)가 김성곤씨(쌍용그룹 창업자 겸 전 국회의원·가운데), 김택수씨
“요새 내기 골프들 많이 하죠. 내기에 ‘따따’라는 게 있지. 이 홀에서 승부가 나지 않으면 판돈이 배로 늘어나 ‘더블’이 됩니다. 그걸 속된 말로 ‘따블’ 또는 ‘따’라고 부르지. 그런데 두 번째 홀에서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따따’를 외쳐요. 더블에 더블 즉 판돈이 4배로 늘어나는 거지. ‘따따’의 원조가 누군지 압니까. 바로 김형욱이야. 그 사람 쌍용그룹 창업자인 김성곤씨, 신진자동차 김창원 사장 등과 몰려다니며 지독하게 내기 골프를 쳤지. 액수도 컸어요.
김형욱이는 내기를 하다 지면 ‘따’를 부르고, 또 지면 ‘따따’를 막 불렀지. 그래도 계속 돈을 잃으면 마지막 9홀에서 ‘프레스’를 불러요. 자기가 이기면 그때까지 잃은 돈을 모두 회수하게 되고, 지면 돈을 두 배로 내야 하지. 별 짓을 해도 안 되면 15,16홀쯤 돼서 비서가 달려와 쪽지를 하나 건넵니다. 그걸 읽는 시늉을 한 후엔 ‘지금 청와대에서 오라고 그럽니다. 미안하지만 나 가봐야겠소’라고 말하며 중간에 도망쳐버리지. 남은 사람들은 지붕 위에 올라간 닭 쳐다보는 꼴이야. 오죽했으면 ‘김형욱이에게 돈 안 잃은 사람 없고, 김형욱이에게 돈 따본 사람 없다’는 말이 나오겠어.”
JP는 재미로 약간의 돈을 걸고 골프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큰 돈을 걸고 내기 골프를 하는 것은 스스로 격을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말한다. JP는 파 3의 짧은 홀에서만 약간의 돈을 걸고 내기를 하는데, 돈을 따면 캐디에게 팁으로 준다. 그래서 캐디들 사이에서는 JP의 인기가 높다.
골프 이야기를 하기 위한 짧은 만남으로 JP의 물욕에 대한 생각은 알 순 없으나 그의 삶의 방식이나 언행을 보면 쉽게 돈에 현혹될 인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살고 있는 청구동 집은 44년 전에 구입한 것입니다. 별다른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집 장사에게 싸게 얻었지. 70년대 총리를 할 때 주변에서 ‘JP는 아방궁에 산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직접 눈으로 보면 알잖아요. 이게 어디 아방궁인가. 난 비 맞지 않고 사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도 엉뚱한 소리를 하길래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곳에 사는지 알아본 일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내가 사는 곳이 아방궁이 아니라 그 사람들 사는 곳이 아방궁이더구먼.”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JP의 청구동 자택은 깨끗하지만 결코 화려한 곳은 아니었다. 마당까지 포함해 100평 정도의 낡은 고택(古宅)인데, 잘 손질된 정원 모퉁이에 있는 조각상이 인상적이었다. 일반인들의 감각으로는 100평짜리 집이 크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정치 거물의 집 치고는 소박한 수준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거실에 놓인 소니TV와 벽에 걸린 세이코 시계는 이제는 골동품 가게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오래 된 물건들이다.
“난 돈에 대해 욕심이 별로 없어요. 돈이란 대한민국 안에서 유통되면 되지 그게 내 호주머니에 있든 남의 호주머니에 있든 무슨 상관입니까. 밥만 먹고 살면 되지 그 이상의 돈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죽을 때는 다 놓고 가게 되어있어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아닙니까. 이런 게 돈에 대한 내 철학입니다.”
개인적인 치부를 삶의 가치 기준에서 빼버렸거나 있다고 해도 아주 낮은 곳에 두고 대신 국가의 경제발전을 최상위에 뒀다는 점에서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닮은 점이 많다. 이런 두 사람의 눈에는 거액의 내기 골프를 하고 돌아다니는 김형욱씨의 행위가 곱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JP는 김형욱씨뿐 아니라 박 대통령에 얽힌 골프 에피소드도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 그중 한 토막.
“한번은 서울컨트리클럽에서 박 대통령을 모시고 쳤는데, 전반 9홀을 다 돌고 후반 홀을 돌려고 하는데 앞에 미국 사람 2명과 한국 사람 2명이 골프를 치고 있었어요. 후반 9홀의 첫 홀은 그린 앞에 연못이 있는 파 3홀이었지. 대통령이 뒤에서 구경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골프 삼매경에 빠져 있었어요. 먼저 친 세 사람은 모두 온 그린에 성공했는데 마지막에 친 미국 사람 공이 짧아서 그만 물에 빠지고 만 거야. 성질이 난 그 친구가 연달아 세 번이나 쳤는데 모두 물에 빠졌어요.
골프는 심리적인 게임인데 성질을 내면 스윙이 되나. 화가 잔뜩 난 그 친구가 하프 골프 백을 연못 속에 집어 던져버리고는 골프 안 친다며 들어가버렸어. 가만히 지켜보시던 박 대통령께서 ‘어이구 그 사람 성질 꽤나 급하구먼’하고 허허 웃으시던 생각이 나요. 그런데 잠시 후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온 거야. 가다가 생각이 달라졌나 했는데 그게 아니야. 골프 백 속에 자동차 키를 넣어뒀던 거야. 허겁지겁 바짓가랑이를 접고 물 속에 들어가 백을 건져올려 키를 꺼내더니만 갑자기 골프채를 모두 꺼내 꺾어버리고는 다시 돌아가는 거지 뭐야. 골프가 대체 뭐라고 그런 성질을 부려. 허기야 퍼팅이 잘 안 된다고 퍼터를 내동댕이치는 프로도 있지만….”
JP가 골프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언론의 표적이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내각제 실현을 위해 정치 일선에서 뛸 때의 일이다. 당시 주요 방송과 일간지의 자민련 출입 기자들이 골프 치는 JP에게 태클을 거는 일도 많았다.
“처음에는 참았는데 도가 지나친 겁니다. 그래서 내가 골프 치는 것을 비난하는 기사를 쓴 기자들을 불러 호통을 쳤어요. 내가 골프 칠 때 당신들이 돈을 대줬나. 아니면 내가 근무시간에 골프 치는 것을 봤나. 나이 70 넘은 사람이 골프를 운동 삼아 건강을 유지하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라고 그러느냐. 내가 앓아 누우면 대신 앓을 것도 아닌데 왜 간섭하느냐고 야단을 쳤죠. 그런 기사를 쓴 기자들도 다 골프를 치면서도 그랬어요. 기자들이 함부로 글을 쓰면 못 써요. 내가 골프 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삼총사 기자들이 있었어. 나중에 정치부장도 하고 높은 자리에 올랐더구먼. 허허.”
김국진 기자 (bitkuni@joins. 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