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의 골프이야기] “‘따따’의 원조는 바로 김형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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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우)가 김성곤씨(쌍용그룹 창업자 겸 전 국회의원·가운데), 김택수씨

'골프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실 상대와의 경쟁이 없다면 시시할 것이다. 그래서 골프를 즐기는 대부분의 주말 골퍼들은 크고 작은 내기를 한다. 타당 5000원, 1만원짜리 내기를 하면서도 기뻐하고, 흥분하고, 열 받기까지 하는 것은 그저 그런 월급쟁이나 수백억, 수천억원대의 재력가나 다를 바 없다. 행복과 불행이 대부분 남과의 경쟁에서 나오는 게 삶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JP는 한때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있으면서 권력을 휘두르다가 해외 망명지에서 비명횡사한 김형욱씨를 유난히도 욕심 많고 경쟁심 강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과욕이 화를 부른 것은 아닐까.

“요새 내기 골프들 많이 하죠. 내기에 ‘따따’라는 게 있지. 이 홀에서 승부가 나지 않으면 판돈이 배로 늘어나 ‘더블’이 됩니다. 그걸 속된 말로 ‘따블’ 또는 ‘따’라고 부르지. 그런데 두 번째 홀에서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따따’를 외쳐요. 더블에 더블 즉 판돈이 4배로 늘어나는 거지. ‘따따’의 원조가 누군지 압니까. 바로 김형욱이야. 그 사람 쌍용그룹 창업자인 김성곤씨, 신진자동차 김창원 사장 등과 몰려다니며 지독하게 내기 골프를 쳤지. 액수도 컸어요.
김형욱이는 내기를 하다 지면 ‘따’를 부르고, 또 지면 ‘따따’를 막 불렀지. 그래도 계속 돈을 잃으면 마지막 9홀에서 ‘프레스’를 불러요. 자기가 이기면 그때까지 잃은 돈을 모두 회수하게 되고, 지면 돈을 두 배로 내야 하지. 별 짓을 해도 안 되면 15,16홀쯤 돼서 비서가 달려와 쪽지를 하나 건넵니다. 그걸 읽는 시늉을 한 후엔 ‘지금 청와대에서 오라고 그럽니다. 미안하지만 나 가봐야겠소’라고 말하며 중간에 도망쳐버리지. 남은 사람들은 지붕 위에 올라간 닭 쳐다보는 꼴이야. 오죽했으면 ‘김형욱이에게 돈 안 잃은 사람 없고, 김형욱이에게 돈 따본 사람 없다’는 말이 나오겠어.”

JP는 재미로 약간의 돈을 걸고 골프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큰 돈을 걸고 내기 골프를 하는 것은 스스로 격을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말한다. JP는 파 3의 짧은 홀에서만 약간의 돈을 걸고 내기를 하는데, 돈을 따면 캐디에게 팁으로 준다. 그래서 캐디들 사이에서는 JP의 인기가 높다.

골프 이야기를 하기 위한 짧은 만남으로 JP의 물욕에 대한 생각은 알 순 없으나 그의 삶의 방식이나 언행을 보면 쉽게 돈에 현혹될 인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살고 있는 청구동 집은 44년 전에 구입한 것입니다. 별다른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집 장사에게 싸게 얻었지. 70년대 총리를 할 때 주변에서 ‘JP는 아방궁에 산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직접 눈으로 보면 알잖아요. 이게 어디 아방궁인가. 난 비 맞지 않고 사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도 엉뚱한 소리를 하길래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곳에 사는지 알아본 일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내가 사는 곳이 아방궁이 아니라 그 사람들 사는 곳이 아방궁이더구먼.”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JP의 청구동 자택은 깨끗하지만 결코 화려한 곳은 아니었다. 마당까지 포함해 100평 정도의 낡은 고택(古宅)인데, 잘 손질된 정원 모퉁이에 있는 조각상이 인상적이었다. 일반인들의 감각으로는 100평짜리 집이 크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정치 거물의 집 치고는 소박한 수준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거실에 놓인 소니TV와 벽에 걸린 세이코 시계는 이제는 골동품 가게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오래 된 물건들이다.

“난 돈에 대해 욕심이 별로 없어요. 돈이란 대한민국 안에서 유통되면 되지 그게 내 호주머니에 있든 남의 호주머니에 있든 무슨 상관입니까. 밥만 먹고 살면 되지 그 이상의 돈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죽을 때는 다 놓고 가게 되어있어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아닙니까. 이런 게 돈에 대한 내 철학입니다.”

개인적인 치부를 삶의 가치 기준에서 빼버렸거나 있다고 해도 아주 낮은 곳에 두고 대신 국가의 경제발전을 최상위에 뒀다는 점에서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닮은 점이 많다. 이런 두 사람의 눈에는 거액의 내기 골프를 하고 돌아다니는 김형욱씨의 행위가 곱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JP는 김형욱씨뿐 아니라 박 대통령에 얽힌 골프 에피소드도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 그중 한 토막.

“한번은 서울컨트리클럽에서 박 대통령을 모시고 쳤는데, 전반 9홀을 다 돌고 후반 홀을 돌려고 하는데 앞에 미국 사람 2명과 한국 사람 2명이 골프를 치고 있었어요. 후반 9홀의 첫 홀은 그린 앞에 연못이 있는 파 3홀이었지. 대통령이 뒤에서 구경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골프 삼매경에 빠져 있었어요. 먼저 친 세 사람은 모두 온 그린에 성공했는데 마지막에 친 미국 사람 공이 짧아서 그만 물에 빠지고 만 거야. 성질이 난 그 친구가 연달아 세 번이나 쳤는데 모두 물에 빠졌어요.

골프는 심리적인 게임인데 성질을 내면 스윙이 되나. 화가 잔뜩 난 그 친구가 하프 골프 백을 연못 속에 집어 던져버리고는 골프 안 친다며 들어가버렸어. 가만히 지켜보시던 박 대통령께서 ‘어이구 그 사람 성질 꽤나 급하구먼’하고 허허 웃으시던 생각이 나요. 그런데 잠시 후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온 거야. 가다가 생각이 달라졌나 했는데 그게 아니야. 골프 백 속에 자동차 키를 넣어뒀던 거야. 허겁지겁 바짓가랑이를 접고 물 속에 들어가 백을 건져올려 키를 꺼내더니만 갑자기 골프채를 모두 꺼내 꺾어버리고는 다시 돌아가는 거지 뭐야. 골프가 대체 뭐라고 그런 성질을 부려. 허기야 퍼팅이 잘 안 된다고 퍼터를 내동댕이치는 프로도 있지만….”

JP가 골프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언론의 표적이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내각제 실현을 위해 정치 일선에서 뛸 때의 일이다. 당시 주요 방송과 일간지의 자민련 출입 기자들이 골프 치는 JP에게 태클을 거는 일도 많았다.

“처음에는 참았는데 도가 지나친 겁니다. 그래서 내가 골프 치는 것을 비난하는 기사를 쓴 기자들을 불러 호통을 쳤어요. 내가 골프 칠 때 당신들이 돈을 대줬나. 아니면 내가 근무시간에 골프 치는 것을 봤나. 나이 70 넘은 사람이 골프를 운동 삼아 건강을 유지하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라고 그러느냐. 내가 앓아 누우면 대신 앓을 것도 아닌데 왜 간섭하느냐고 야단을 쳤죠. 그런 기사를 쓴 기자들도 다 골프를 치면서도 그랬어요. 기자들이 함부로 글을 쓰면 못 써요. 내가 골프 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삼총사 기자들이 있었어. 나중에 정치부장도 하고 높은 자리에 올랐더구먼. 허허.”

김국진 기자 (bitkuni@joins.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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